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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1.25
    45세 나이에 북경대학교수 박세룡은 이번 가장 젊은 중국과학원원사로 뽑혔다 ..학생들한테서 학술의<대신(大神)>이라고 불리는 박세룡 어떤분이실까?
  2. 2021.11.19
    71세되는 장예모감독은 야밤에 딸의 구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크게 화를 내면서 <그 서양인과 이혼하고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3. 2020.09.30
    본인이 아들이 있으니.. 이런 드라마에 폭 ~ 빠져버렸네요.. 감명깁게 잘 봤어요
  4. 2020.05.12
    나의 시네마같은 긴긴 여정끝에 도착한--归宿~

2021년 중국과학원에서 149명 원사들 당섬되었고

그중 중국과학원에서 추가로 당섬된 원사는 65명,

평균년령은 57.4세, 가장 어린분은 45세이다.. 

요즘 인터넷 및 뉴스를 뜨겁게 달군 분은

가장 어린 나이 45세에 원사로 당섬된분이시고..

그분은 박세룡교수님 북경대학 자연지리학 교수이시다. 

틱톡 및 각종 SNS에서도..

이분의 축하 동영상 메시지가

많이 올라오고 있다.. 

박세룡,, 1976년 4월 길림 연변에서 태여났고

중국과원원 원사, 북경대학 도시및 환경학원생태학계 교수이고

중국과학원 천장고원지구과연구팀의 주요맴버이며 연구원,

석사, 박사 연구생의 스승이다..

박세룡은 1999년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2004년에 북경대학리과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2007년 프랑스 기후및환경과학실험실

(Laboratoire des Sciences du Climat et de I’Environnement)

박사들 논의에 참여하였고 2021년 중국과학원원사로 당섬되었다..

박세룡의 연구대상은 주로 지구 변화

및 육지 생태 시스템으로 주요 관심사는

육상 생태계 탄소순환이고

기후변화가 식물 생장에 미치는 영향, 생태

수문, 토지의 이용이 기후에 대한 피드백이다

 

1976년 4월 박세룡은 길림성 연변자치주

연길 일반 가정에서 태여났고 1995년 9월에 북경대학

도시및환경학계환경과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1999년7월 북경대학 환경학계에서 졸업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9년 9월 박세룡은

북경대학환경학원생태학계자연지리학 석사

박사공부를 계속 하였고 

2004년6월에 북경대학환경학원생태학계를 졸업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8월 프랑스 기후 및

환경과학실험실

(Laboratoire des Sciences du Climat et de I’Environnement)에

들어가서 박사후 과학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2007년 1월 박세룡은 북경대학으로부터 도시&

환경학원의 연구원으로 초빙되었고 2010년 8월에는

북경대학생태학계의 교수로 승급하였다..

2011년 8월에는 <2011년 국가 걸출한 청년기금>으로 부터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장강특별초빙교수>로 임명되었다..

2021년11월18일 박세룡은 중국과학원지학부원사로 선정되었고

45세나이에 2021년 가장 젊은 <양원원사(两院院士)>로

선정되어 요즘 인터넷 및 뉴스를 뜨겁게 달궜다..

박세룡의 연구방향은 지구변화와 육상생태계이고

주요 관심사는 육지  생태계 탄소 순환,

기후 변화가 식생 생장에 미치는 영향,

생태 수문, 토지 이용 변화가

기후에 대한 피드백이 포함된다

과학연구 항목으로는 2016-2020년 기금회중점항목:

극단적인 기후가 중국 육지

생태계 탄소원회 기능에 미치는 영향 (진행자)

2016-2018년 기금회 국제(지역)합작및 교류항목:

기후변화와 인위행위로

장강과 황하영역등 지역에 주는 영향(진행자)

2013-2017,중대과학연구계획

"지구 변화가 중국의 전형적인 초지 생태 과정에 미치는 영향

및 생태 환경 효과""제3과목"

중국의 대표적인 초지 생태 환경 요소의 시공 구조(진행자)

2012-2015 기금회 걸출한 청년 기금--

지구변화 및 육지생태계(진행자)

2014-2017,Seventh framework programme

of the European Union, Land-use change:

assessing the net climate forcing, and

optionsforclimate change mitigation and adaptation(참석)

2010-2013,Seventh framework programme

of the European Union, 30 year reanalysis of

CARBON fluxES and pools over Europe and the Globe(참여)

학술논문

박세룡은  SCI(E)간행물에 논문 250여 편 발표하였고 

그중중 첫 번째 또는 통신저자 논문 120여 편정도 되며..

웹오브사이언스에서 SCI(E) 논문 2만5000여 회 인용 1위

또는 통신저자 논문 30여 편 인용 100회 이상된다..

성과는 Nature(4편), Nature Climate Change(1편),

Nature Ecology Evolution(2편)에 의해 전문적으로 평가되었다.

 

상받은 성과

2003년 박세용, '중국육지생태계 탄소순환 및

생산력 연구'..."교육부 국가과학기술상 1등 수상"

2006년 박세용 박사학위 논문

전국 우수박사 논문 100편 수상

2009년 박세용, 최고 완성자 성과로

"2009년 중국 기초연구 10대 뉴스"

2013년 박세용 1등으로 네이처에 발표한

'주야 비대칭 증온이 북반구 육상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2013년 중국고등학교

10대 과학기술 진전"상을 받았다

2011년 박세룡은

<제12기 중국청년과학기술상>을 받았고

2012년 박세룡 교육부 양자강특별초빙교수로 초빙되었고 ...

'중조부 청년인재 발탁 계획'에 당섬되었다

2016년 박세룡은

<제3차세계과학원(TWAS)지구과학상>을 받았으며

2020년에는 제2차 <과학탐사상>을 받았다

2021년 4월 박세룡은 스탠퍼드대학에서 발표한

2020세계2%최고과학가

생애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2021년 11월18일 박세룡은

중국과학원지학부원사로 45세 나이에

2021년 중국에서 가장 젊은 원사로 선정되어

이슈가 되었다

현재 박세룡은 북경대학의 교수이시고

중국과학원 칭짱고원 지구과학 탁월혁신센터 핵심 주요책임자이고

중국과학원칭장고원연구소에서 초빙된 연구원이며

자연자원부 육표시스템과 인간관계 중점실험실 학술위원회 위원,

북경대학 지표과정분석 및 모의교육부

중점실험실 학술위원회 위원 등 직위를 맡고 있다

 

 

And

전에 한분께서 중화권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감독

10명을 꼽으라고 하면 그중에 풍소강(冯小刚)과

주성치(周星驰)는 있기는 하지만 탑 5위 안에 못들어갔고

탑 3위내에는 할리우드 화교감독인 이안(李安)과

감독계의 신화로 알려진 장예모(张艺谋) 및 완벽함의

극치를 추가하는 왕쟈위이(王家卫) 감독이 들어간다..

우리한테 익숙한 감독은 그래도 장예모(张艺谋)이며..

특히.. 그가 북경 올림픽의 개막식 총 감독으로

전세계에 많이 알려졌다.. 

그의 엄청난 성과도 유명하지만..

그와 중화권에 유명한 배우 공리(巩俐)와의

러브스토리 및 애를 많이 낳아

벌금을 당한 일들도..

많은 사람들의 말밥에 오른군 한다. 

1950년에 서안에서 태여난 장예모는

중국의 제5대세대 감독중 대표적인 분인시다..

그는 <추구 소송을 걸다(秋菊打官司)>, <살아서(活着)>,

<영웅(英雄)>, <훙고오량(红高粱)>등 영화들은

칸, 베를린, 베네치아 등 여러 국제영화상 수상을 하였으며 ,

중국내에서도 상을 가장 많이 받았다.. 

2017년 그는 액션영화 <그림자(影)>로

55기 대만의 금마상에서 베스트 감독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장예모(张艺谋) 성공의 배후에

두 여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중 한명은 큰 딸을 낳아준 전처 소화(肖华)이고

다른 한명은 두 아들과 딸 한명을 낳아준 두분째 안해 천팅(陈婷)이다.. 

장예모(张艺谋)와 전처 소화(肖华)는 중학교 시절의

같은반에 친구이고 긴긴 연해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혼인이였다..

두사람은 1978년에 결혼하였고

1983년에 큰 딸 장머어(张末)가 출생하였다..

장예모(张艺谋)는 큰 딸을 엄청 사랑하였지만..

사업에 열중한 그로서 모녀둘한테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소화(肖华)는 장예모(张艺谋)가

북경영화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데

나이가 많아서 거절 당한다는걸 알고 

여기저기 연줄을 찾아 장예묘(张艺谋)를 도와서

영화학원에 들어갈수 있게 하였다.. 

북경영화학원에 진학과정이 두분의 사이를 갈라놓은

계기가 될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결혼후 제 5년째 1988년에 장예모(张艺谋)와

소화(肖华)는 정식으로 이혼절차를 밟았다.. 

말로는 그때 당시 장예모(张艺谋)가 영화배우

공리(巩俐)한테 반한 원인이였고 장예모(张艺谋)는

공리(巩俐)야말라고 자기를 잘 아는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공리를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두사람의 인연은 심야에 <훙고오량(红高粱)>영화를 촬영하면서

인연이 생기면서 장예모(张艺谋)는 외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소화(肖华)는 딸을 데리고 떠났지만

장예모(张艺谋)는 이혼후 경제상으로

줄곧 전처와 큰 딸 장머어(张末)를 지원을 해줬다고 한다..

장예모(张艺谋)와 소화(肖华)가 이혼을 할때

큰딸 장머어(张末)는 4살밖에 안되었다..

그후로 딸 장머어(张末)의 그때 과정을 회억하면서

이렇게 책에 기록했다고 한다..<난 진짜로 모르겠다..

유명한 배우 공리와 나의 아버지가 함께 있는 사이에 왜서

나와 아버지와의 만날 기회를 주지 않은지..

유일한 딸한테.. 그렇게도 큰 원한이 있는건가>

그만큼 장머어(张末)는  공리(巩俐)라는

개입자를 마음에 두고 속상해했던 것이다.

어른이 된 장머어(张末)는 아버지의 후광과

주변의 이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사랑이 부족한 그는 해외에서

유학을 하면서 주변의 성숙한 외국남자한테 많이 끌렸고

한 외국남자하고 연애를 거쳐 빠른 시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장예모(张艺谋)는 국내에서 자기 큰 딸이 해외로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딸한테 전화하여 말렸지만..

장머어(张末)는 <당신 자신 혼인을 돌아보세요..

저의 본보기가 되셨어요?>라고 아버지한테 반박을 하였다.. 

이렇게 말한 원인은 그 전에 장머어(张末)는 귀국하여

친인들을 방문으로 아버지 사무실로 갔는데 사무실에서

이붓엄마인 천팅(陈婷)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예모(张艺谋)한테 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가를 물었다..

사실 청팅(陈婷)과 장예모(张艺谋)는 벌써 자식이 세명이나 생겼고 

전처 소화(肖华)는 자기 딸과 아버지사이

관계가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사실을 딸 한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23살되는 장머어(张末)는

외국인 퉈워이(托维)와 결혼하였다.. 

유감스럽게 이 혼인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장머어(张末)는 자기 남편 퉈워이(托维)가 바람도

필뿐만 아니라 가정폭행도 일삼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주 술을 마시고 가정폭행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 저녁 장머어(张末)는 남편한테 폭행당하여

몸에 여기저기 멍이 많이 들었고 그는 울면서

아버지 장예모(张艺谋)한테 전화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남편 또 저를 폭행을 했어요.. 아빠 도와주세요,,

지금 저의 몸에는 여기저기 푸른멍으로 가득합니다.>

장예모(张艺谋)는 전화를 받고 분노하여

<당장 돌아오나,, 그 외국인과 바로 이혼을 하고..

그놈은 뭐하는 놈이냐>라고 하였고 

이리하여 장머어(张末)는 귀국하여

아버지 옆에서 보조일을 해줬다.. 

머지않아 장머어(张末)는 또 외국남자와 사귀였고

그는 장머어(张末) 지금 남편인 맹단청(孟丹青)이다.. 

맹당청(孟丹青)는 한국에서 태였났고 중국 청화대학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학문의 권위자였으며 사

람을 대함에도 엄청 따뜻한 분이다.. 

장머어(张末)는 맹당청(孟丹青)과 결혼시

장예모(张艺谋)는 자기 딸이 끝내

본인의 행복을 찾은데 대하여 엄청 기뻐하였다. 

장예모(张艺谋)의 일정을 모면 그는 일찍이 성공으로

유명한 분이시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자녀가 매우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이 될지도 모른다!

 

 

 

And

중국 드라마이고 이름은 <만추>라고 합니다.

근데 이 드라마가 나온지 좀 오래되었어요.. 

평소에는 텔레비를  거의 보지 않고.. 볼 기회도 없어요..

이날.. 그냥 켜놓고 보다가.. 저도모르게.. 이 드라마에 빠졌어요.. 

저도 애가 없을때는 모르겠는데 애가 생기니.. 이러한 스토리에 공감을 하게 되고 

아련하게 느껴지고.. 드라마중 엄마.. 너무 아쉬웠습니다. 

 

엔딩에서.. 아들을 바른길로 갈수 있게 잡아주는데 성공했는데.. 

엄마는 결국 너무 지쳐서.. 큰 병에 걸렸고 치료가 안되고.. 저세상으로 갔는데

너무 불쌍하고.. 드라마를 이렇게 엔딩을 만든게.. 좀 싫었습니다. 

 

드라마 내용은.. 

중국의 한 시골에  가족이 있고.. 엄청 가난하였고.. 

가족에는 아들둘과 시어머니, 며느리와 손주 이렇게 있어요.. 

며느리 이름이 --만추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만추는 엄청 착하고 열심히 일하며 가종이 매우 충성합니다. 

남편 동생한테도 자기 동생처럼 엄청 아껴주고 하여.. 가족 분위기는 엄청 좋고..

남편 동생도.. 만추를 엄청 따릅니다. 

 

근데 너무 가난하여.. 남편은 큰 도시로 돈벌이로 떠났고 어느 식당에서 일하면서..

그 식당 사장과 눈이 맞어.. 결국에는 만추와 이혼하였고..

이에 노한 시어머님은 화가 치밀어..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래도 만추는 시집에 불만이 없고.. 7살정도 되는 아들을 열심히 키웁니다.

시골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남편 동생이 또 대도시로 돈벌러 떠났고.. 

만추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대도시에 들어갑니다. 

혼자몸도 아니고 지식도 없으며 학벌도 없으니.. 대도시에서 엄청난 고생이 찾아오기 마련이죠..

글도 만추는 아들을 위하여.. 아들한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줄려고.

열심히 닥치는대로 돈벌이를 합니다. 

 

그후로 시내 외각에 가게를 맡아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해주면서 점차적으로 돈이 모아지고..

그 자금으로 식품공장을 만들고,,남편 동생을 불러와서 함께 운영하면서

규모도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대기업으로 발전됩니다. 

 

그래서 만추는 재벌이 되었구요.. 아들애도 재벌 자녀답게 호강을 누리면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만추는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아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려구 노력 했죠.. 

아들도 호강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고 어느덧 고중생이 되었습니다. 

만추는 아들한테 잘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호강속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심리상태가 바뀌여 지면서.. 

나쁜 습관이 길러지고.. 나중에는 본인 피랍으로 어머니한테 돈을 협박하는 자작극까지 만들었고.. 

경찰의 도움으로 이 사건이 아들의 자작극이라는걸 알게 되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후로 만추는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본인의 육아에 문제가 생긴걸.. 깨달았고 의문도 가졌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을때 엄청 가난했을때 7살정도 되는 아들애는 엄청 올바르고 효도스러웠고 

어머니를 엄청  아껴줬어요.. 

근데 호화스러운 생활을 만들어줬는데 아들애는 되려 삐뚤어 지는군요.. 

거짓말이 많아지고.. 나쁜 사회친구들을 많이 하귀게 되고 허풍도 많아졌습니다. 

 

만추는 계속 이 상태로 이어나가면 아들의 인생이 망칠것 같아서.. 

아들을 어떻게 하면 바른길로 돌아서게 할수 있을가.. 고민끝에.. 

삼촌(남편동생)과 자작극을 만들었습니다. 

 

삼촌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추를 회사에 쫓아내고.. 회사를 독차지 하게 되고..

만추는 또 가난으로 돌아갔고.. 짐을 싸서 아들과 함께 시내 외각에 있는 

쪽방에 세를 맡고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추는 집 옆에 창고를 다시 정리하여 두부 방을 만들었고.. 

매일매일 두부를 만들어서 밀차에 싣고 시장에  갖다 팝니다.. 

판 돈은 얼마 안되지만.. 아들애의 생활가 학업에.. 빠듯하지만.. 글도 해결은 됩니다. 

 

가난으로 다시 돌아간 엄마와 함께 낡은 쪽방집에서 생활하게 된 아들은 

처음에 쉽게 받아 들이지 않았고.. 삼촌한테 한반탕 해내지만.. 

결국에는 쫓겨 납니다. 

 

처음에는 본인도.. 모든게.. 없어지니.. 사회 나쁜 친구들 만나면서  스트레스를 풀려다가..

오히려 무시당하고 매도 맞고.. 

 

그러다가.. 어머님이 매일매일 힘들고 고생스럽게 일하지만.. 

항상 옆에서 따뜻한 멘토와 열심히 자기를 보살피는 모습에  

마음이 좀씩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더 생각하게 되고.. 

7살때 모습으로 돌아온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힘들게 두부를 팔면서 아들을 열심히 챙겨주고.. 아들이 대학교 입학수능에..  몰두하도록

노력을 합니다. 

다행이 어릴때 한동네서 살았던 아저씨한분.. 어머님을 많이 도와줍니다. 

그집 아들과 동갑이여서..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입니다. 

아저씨는 현재 공무원으로 교육국 국장이고 .. 

만추의 두부가 학교로 팔릴수 있게 두움을 줍니다. 

 

아들애는 어머니의 열정에 감동되어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에는 최고 학부인--북경대학에 합격되었습니다. 

 

만추는 아들애의 북경대학 입학 통지서를 받고.. 한동안 큰 울음 터뜨립니다. 

성공의 눈물이죠.. 

 

만추는 아들애 대학교로 가는 전날에 모든 분들 초청하여 식사자리를 마련하였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삼촌하고 함께 꾸몄던 자작극을 설명해주는데.. 

모든분들 놀라고..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특히 아들애는 더더욱 놀라하고 어머님이 자기자신을 위하여.. 이러한 희생을 하신거에 대해..

너무 미안하고 어머님을 너무 고생시켜서 마음이 아퍼 많이 울었습니다. 

 

삼촌은 그동안 사업및 재무 보고서를 만추한테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만추는 잠간 기다리라고 합니다. 

만추는 한동안 설명을 해주고 또 여러분들한테 고마운 인사도 전하고 술을 권합니다. 

 

근데 아쉬운점이 만추는 전에 위암말기로 판정 받았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식사자리에서 삼촌한테 아들과 회사를 부탁하고.. 그만 의식을 잃게 되고.. 됩니다. 

 

숨을 거둘 임박에 아들은 엄마를 업고 엄마가 원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걷습니다. 

십여년전에 만추는 고향에서 시내로 올때 7살되는 아들을 업고 이 길을 걸었었죠.. 

만추와 관련된 많은 분들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옵니다. 

 

만추는 아들등에 업혀 엄청 행복해 하였습니다. 

 

 

 

 

And

돌이켜보면.. 엄청난 여정을 한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런거...

별거 아닌것 같기도 하고.. 

많이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었던 날.. 기억도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24년전에.. 처음으로 여행업이란.. 업종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이 업종을 하고 있으니.. 놀랍죠.. 

하여간.. 여행업은 저한테 딱 맞는 업종인것 같고.. 

다른것 시도해봐도.. 결과는 별로 였으니..

 

24년전에 무한에 .. 장강해외여행총회사에.. 취직하였고.. 가이드를 시작하였다.. 

가이드.. 처음으로 접해보는 .. 명칭으로 

처음에는 베테랑가이들들 몇번 동행해보고.. 아~ 이런거구나.. 생각하고.. 

 

근데..손님앞에서 맨트 할려면.. 무지 공부해야겠구나.. 하고.. 생각되어..

그날로 무한대형서점에서 우선은 우한 포함하여,,호북을 알아야 하니..

우한 호북에 관련된 서적 및 촉나라 관련된 서적, 삼국연의, 진시황, 이백, 강희황제 등등

 엄청 사들였고.. 그날부터.. 독서 시작하고.. 본인만의 맨드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가이드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긴장되었는데..

자꾸 하닌깐.. 재미있기도 하고.. 

그땐 우한에 한국말 가이드 저 포함하여 두명밖에 없으니.. 무한의 모든 여행사들.. 

한국팀을 모두 맡았고.. 정부측의 통역도 겸하여.. 

나름대로 괜찮은것 같다..

 

근데.. 98년인가,, 양자강 대홍수와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거의 일년 공백이였으니.. 수익도..제로.. 

그 기간은 엄청나게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것 처럼 느껴진다.. 

 

그후로.. 의창여행사 사장의 요청으로 그분 여행사에 합류하여..  정식으로 업무진행을 맡았고..

그때 까지 한국여행사는 아직 잘 몰랐으니.. 

전에 가이드로 받은 단체 한국여행사들은 하도 많으니.. 기억도 안나고,,다만 자유여행사가 가장 많은듯..

의창여행사에 들어온후.. 대한한공 무한 취항 연합팀을 하면서.. 

한국 여행사들 알게 되었고.. 

 

몇년후에 성도에 진입.. 

성도 들어오기 전에.. 충칭초상국제여행사 사장님이.. 요청으로.. 한국부를 맡게 되었고..

충칭에서 3-4년인가..거주하게 되었다..

아파트도 구입하고.. 충칭에 호구도 올리고..

충칭에 영원히..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구채구를 수배할려니..충칭이 엄청.. 불편하다.. 

어쩔수 없이..성도로 이주하였다.. 

 

하나투어와 손잡고 구채구 패키지를 시작하였고..  사무실이 천주사에 있으니

그냥...이웃집에 드나들듯이.. 

매일 구채구로.. 질리게 다닌듯.. 

가장 바쁘게 다녔던.. 일정.. : 이날은 구채구에서 일을 보고.. 다시 성도로 와서.. 다음날 라싸로 넘어가고..

라싸에서 5일정도 일을 보고 성도로 들어와서 그담날 서울로 출장 가고.. 

충칭과 성도에 있는 동안은 그냥.. 여기저기.. ..참으로 많이 다녔고..

 바쁜하루하루 ~~

 

그후로는 ..친구를 따라 동티벳을 다녔다..

친구는 자가운전투어를 주로 많이 하고..테마활동을 많이 진행한다..

<오량액>주최 태양부락 자가운전투어

장애자 자체 운전으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투어.. 

여인국 자바 집벽을 타기 경기(파팡즈) 등등.. 

그래서.. 충칭분이신데  동티벳분들 진짜 이분을 모르는 사람 없을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정부분들 많이 알고.. 친구들도 엄청 많으니..

그분.. 사전 답사 투어에 동행하게 되었고..

(캠핑카로,, 성도--캉딩--신두교--도오청--더룽--리쟝--루구후--판즈화--구룡--신두교--타공--단바--성도  15일)

가는곳마다,, 현지 티벳인친구들과 너무 재미 있었고..

여직까지.. 여행업을 하면서..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 아닌가 싶다.. 

 

그후로 패키지는 접고,,혼자,, 동티벳 답사를 많이 다녔다..

그 친구덕에 캉딩, 또오청 등등 동티벳 지역의 친구들 알게 되면서..

답사 하고.. 단체 행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티벳친구들.. 너무 좋고.. 티벳 전체가 .. 너무 좋고..

남들이 못먹는다는 티벳음식도.. 가리지 않고.. 너무 맛있는듯하다..

그때는 내 전생이 티벳인이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후로.. 동티벳에 올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많이 다녔고.. 한국단체 행사도 많이 하고.. 

구채구 패키지와 달리.. 동티벳투어는 고생이 많긴 하지만.. 영원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그냥 꿈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느낌.. 

 

동티벳 투어를 하면서.. 우연히.. 문경 보현정사의 여자스님을 알게 되었고.. 

스님 팀 행사를 네번을 해왔고.. 스님 초청으로 문경에 보현정사에도.. 가보았다..

 

 

 

후에 우연히 온라인으로 지금 남편을 알게 되었고.. 

보현정사를 미팅장소로 약속을 잡았고.. 

스님께서  판단과 참고건의등을 해주셨다..

그리곤.. 결혼식은.. 보현정사에서 해주시겠다고.. 꼭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그해 11월23일에 사찰에서,,화원식 결혼식을 치렀다..

 

신기하기도 하고.. 많은 신도분들 축하를 해주시고.. 

사찰에서 경비 한푼도 안받으시고..

후에 신도분들 주시는 축의금을 모두 사찰의 모금함에 넣었다.. 

 

생전 처음 보는 화원식,, 뜻깊고.. 비용도 안들고.. 간결하면서도..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다.. 

불교를 믿는거는 아니지만.. 티벳을 많이 다니면서.. 

종교에서는 불교를 선호한다.. 

 

신도분들..이날 가장 많이 오셨고  너무 성의깊게... 행사장을 꾸며주셔서.. 

스님께 너무너무 감사하고 감동받았다.. 

그렇게 결혼식을 마치고.. 이도백하로 들어갔다.. 

사실 이도백하로 오기전에 이도백하라는 지명이름을 들어본적 없고..

처음 여기왔을때.. 신기하기도 하고.. 조심조심 하게 되고.. ㅎㅎ

그렇게 일년 이년.. 지내면서 공기는 좋은데.. 성도에 있다가 여기에 오니..

너무 심심하고 내가 할수 잇는 일을 찾을려니.. 뜻대로 안되고..

많이 방콕하였고.. 후에는 의창에서 여행사하는 동생이 하도 와서 도와달라고 하여..

의창에 일단 갔다.... 며칠 지나서..의창의 동생분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누님.. 임심한것 같기도 한데.. 가서 검사를 해보>.. 나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지고..

그래서 병원갔더니.. 3개월거의 된다고 한다..

와~ 진짜 임신인걸 전혀 몰랐고 그전에 여기저기 많이 다니고..등산도 많이 다니고

뛰여다니기는 얼마나 했는데...근데.. 떨어지지 않고.. 

동생도 많이 놀라와하고 남편도 놀라와 한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이도백하로 들어가서.. 

.. 운동도 하고.. 검사도..제때에 받고.. 열심히 태아를 키웠다.. 

아마 출산전날까지.. 이도백하 마을을 한바퀴 걸어다녔으니..

많은 분들은 저의 뒤를 보면 임신한 사람 같지 않다고 한다.. 

 

 

부처님의 축복을 주셨기에.. 오늘날.. 예쁜 아들도 봤고.. 

공기좋고 물좋은 백두산 이도백하에서.. 

지금까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자기만의 숙소와 여행사를 등록하고 운영하면서.. 

안정을 찾은듯하다.. 

 

아마 여기가 나의 归宿가 아닐가 싶다.. 

 

글재주는 없고..그냥 생각대로 나의 인생사를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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