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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21
    <6국을 완전 멸하고>화하(华夏-중국옛명칭)를 최종 통일한 사람은 한무제(汉武帝)이고 진시황은 아니였다..
  2. 2021.02.17
    고대에 철근이 없었고 찹쌀풀로 만든 만리장성은 어떻게 천 년 동안 우뚝 서서 무너지지 않았을까? 알고보니 진시황은 블랙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였다

진시황이 6개국을 멸하고

화샤(华夏)를 통일한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하지만 통일한 진나라왕조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진시황이 죽고난후

2세에와서 몇년안지나   

진(秦)제국은 다시 살아나는 6개국의 힘에 의해 무너졌다.

 

여기서 <6국>은 완전에 소멸되지 않았음을 뻔하게 느껴지고

6국(제초연한조위 齐楚燕韩赵魏)의 분단 역량과 생명력이 매우 강인하여,

실제로는 화샤(华夏) 통일 프로세스의 대항자이자 전복자가 되었다.

즉, 6개국의 복벽력을 근원적으로 소멸시켜야만

화샤(华夏) 의 진정한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는 판도 형식뿐 아니라 고대 국민의 국족적 공감대도 포함한다.

>>진새황의 통일은 한때 파괴를 받았다..

 

전국(战国)후기 시작하여 진시황의 전국통일과정이 전개되면서 

먼저 멸망된 6국은 이미 복벽(复辟)의 힘이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복벽 역량(复辟力量)은,

남아 있는 6국의  왕족·귀족·장령뿐 아니라,

원래 6국 통치하의 일반 백성들도 포함하였다.

이런 복벽의 힘复辟力量)은 무력에 있지 않고,

6개국 유민의 국가 정체성이다.

 

제() 나라왕조 같은 경우 역사상에서

일찍이 연나라(燕国), 진나라(秦国) 및

항우(项羽)에 의하여 정복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제나라(齐国)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는 훗날 제나라(齐国) 다시 일어날수 있는

가장 관건적인 기초로 된다고 생각한다..

<田横五百壮士탠앤헝 500용사>라는

스토리에서 슬프고 아름다웠지만

제나라(齐国) 사람들의 완강한 추구는

제나라(齐国)를 다시 일쿼세우고 

그 나라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 6국의 복벽의 힘(复辟力量) 은 언제쯤 깔끔하게 소멸되었고

고대 중국 진정으로 화샤(华夏)통일은 언제로 인정될수 있을가?

 

진시황은 당연히 완성못했다고 생각하고

서초(西楚)패왕(霸王), 항우(项羽)는 더한 역륙주였다

그럼 한고조유방(汉高祖刘邦)은 했냈다고 할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면

유방(刘邦)은 3분의2를 완성하였다고 생각된다

 

진나라왕조가 멸망시기

항우(项羽)는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대분봉(大分封)"을 진행하면서

다시 전국(战国)시기의 6국이 회복되었고

심지어 더 많아졌다..

여기에 한왕(汉王), 하남왕(河南王), 웅왕(雍王),

싸이왕(塞王), 구강왕(九江王), 은왕(殷王) 등등

12개 왕국을 더 추가하였다..

항우(项羽)의 분봉(分封)은 6국이 다시 회복될수 있는

희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켰고

반면 화샤(华夏) 정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6국의 복벽력(复辟力量)은 <일가일성(一家一姓)>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항우(项羽)도 약간의 긍정적인 작용을 하며

그것이 바로 6개국의 왕족들이

왕위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타파하여

여러명의 밑바닥 출신 장수들도 역시 왕이 되었고

이로서 진승오광(陈胜吴广)의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王侯将相宁有种乎)>의

정신을 관철시켰다..

 

유방(刘邦)이 항우(项羽)를 소멸시켰을 때,

또 연이어 다수의 이성왕(异姓王)을 제거하였고

여기 이성왕(异姓王)에는 제나라(齐国)뿐만 아니라

조나라(赵国), 한나라(韩国) 등 옛왕족들이 있으며

그외 한신(韩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천희(陈豨) 등 한나라 장군들도 있었다.. 

항우(项羽)와 유방(刘邦)의 이러한 거동은

6개 국의 대물림을 상당 부분 혼란시켰고

6개국의 복벽 역량(复辟力量)에 대한

구유정체성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6 개국의 복위 역량에 있어서,

왕위의 법통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제후국 하나를 복위하자는 호소의 핵심이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당연히 6개국

구 제후왕의 직계 후손이고

그담은 6국왕족의 방계 후손이다..

가령 초나라(楚国)가 복위할 때의 초회왕(楚怀王) 라든가

한나라(韩国)가 복위 당시 한왕성(韩王成)과

한왕신(韩王信), 조나라(赵国) 복위 당시의 조왕헐(赵王歇),

위나라(魏国) 복위 당시의 위왕책(魏王咎)과 위왕포(魏王豹) 은

모두 구초왕(旧楚王), 구한왕(旧韩王),

구조왕(旧赵王), 구위왕(旧魏王)의 직계후손이며

기본은 모두 공자 신분이다

한편, 제나라(齐国)가 복위할 때의

전담(田儋)·전영(田荣)·전횡(田横)은

구제왕의 방계(方系)인 친척일 뿐이다.

 

하지만 6개국의 왕족과 법통이 깨진 후

6개국의 복원의 힘은 이러한 구왕족한테

의탁하기는 엄청 어려운 일이 되었고

한발 물러나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할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과거에 제나라왕과 초나라왕으로 했었던

한신(韩信), 또 연나라(燕王)왕

천희(陈豨), 량나라(梁王)왕 팽월(彭越), 

조나라(赵王)왕 장얼(张耳) 등 분들이

바로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했던 것이다..

 

한신(韩信)이 여러 차례 반한(反漢)의 자립을 부추긴 것은

구 6개국 복위의 힘이 형식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한조(汉朝)의 대다수 이성왕(异姓王)이 숙청된후 

각지역의 제후왕들은 모두 유씨(刘氏)의 자손으로 변해버렸으므로

6개국의 복원의 힘이 이로서 소실된거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정반대로 이런 낡은 '6개국 인정'이

다시 이들 유씨 자손들에게 기탁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경제(汉景帝) 시대의

'칠국지란(七國之亂)'으로,

진(秦)말의 분열 양상을 거의 재현했다.

 

여기서 보다싶이 6개국 복원희 힘은

<일가일성(一家一姓)>의

충성을 개의치 않다는걸 볼수 있고

어떤 지방의 횡포 이익에 부합된다면,

제후는 성은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제나라(齐国)의 군주가 변천한 것을 보고,

이 점을 깊이 깨닫게 되고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제나라(齐国)왕 국주의 성시는 강()씨였고..

전국(战国)시기에 와서는 전()씨로 바꿨으며

초한(楚汉)의 패권 다툼 때 일찍이 한신(韩信)이 충당하여

서한(西汉)시기에 와서는 류()씨성으로 바꿨다

비록 로열 패밀리일지라도

제나라()왕계의 몇 명의 제후(诸侯)<제남왕류피광(济南王刘辟光),

쯔촨 왕류현(淄川王刘贤), 죠오시왕류앙(胶西王刘卬),

죠오둥왕 류웅구(胶东王刘雄渠)>.

들은 여전히 <칠국의란(七国之乱)>에 참여했던

중요요원들이였다..

>> 구유분봉 체계를 종결한 것은, 한 무제(汉武帝)의 추은령이었다.

 

6개국 복원 역량에 대해 철저히 '부저추신(釜底抽薪)'하지 않으면,

일부 지방 세력의 분열 경향을 없앨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나라왕조(汉朝) 역시 화샤(华夏)의

진정한 통일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할수 있고

특히 민족 의식의 통일이다..

 

사실상 결국 낡은 할지(割地) 분봉(分封) 사상을 타파하고,

화샤(华夏) 민족 의식의 대일통을 완성하였으며

이 임무는 한무제(汉武帝)가 진짜로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한무제(汉武帝)의 방법은 바로 <추은령(推恩令)>이였다..

 

"추은령(推恩令)"은 겉으로는

각지역 제후(诸侯)의 왕권을 불할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제후국(诸侯国)을 점차적으로 산산히 쪼각쪼각 냈으며

그들의 다수 군사 정권 권력을 완전히 박탈하였고 

경제권만 남겨줬다.. 

한무제(汉武帝)이후로 지방제후(诸侯)는 더 나아가서

그냥 아무 권리가 없는 허직으로 변화시켰고..

이제 더는 지방 령주(领主)들이 아니다..

이번 행동은 각지의 백성들이

제후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타파하였고

일반인들이 제후에게 충성할 수 있는

법리적 토대도 잃어버렸으며

'조정과 황제에 충성하고'를

일반 백성들의 최종 선택지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6개국의 복벽 역량은 마침내 물 되어 버렸고

더 이상 이런 '총중고골(冢中枯)'을 그리워할 사람은 없게 되었다

어떤 지방의 부호들은 이러한 중앙의 관리에 불만은 있었지만

더는 <복국의구호>를 내세울수 없게 되었으며

봉기된 명분도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샤(华夏)의 통일은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진시황의 6국의 소멸은 그냥  그중 하나의 중요한 단계였으며 전부가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And

사람은 장생불로할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긴긴 역사를 거친 그들만의 특별한 발자취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긴긴 5천여년 역사속에서 문화 계승 발전한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옛 사람들이 그들의 휘황찬란한 한 장면을 남겼다

예를 들면 자금성, 진시황릉,

그리고 세계에서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만리장성 등등 있다..

그런데 왜 만리장성은 천년만년 우뚝 설 수 있는지 엄청 궁금하였다..

현대 건물도 어느정도 세월 지나면 사

용못할정도록 허름한데..

만리장성은 몇천년동안 그렇게 끄떡없을가?

이 문제 연관되는 해답은 비교적 복잡하고  이 문제를 답하기전에 

우선 만리장성의 발전과정을 먼저 얘기해볼라고 한다..

만리장상은  고대의 군사 방어 공사이고 단순히 고립된 성벽이 아니며

성벽을 주체로 하여 방대한 양의 성,

울타리, 정자, 표지를 결합한 방어체계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줄곧 장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고

부동한 시기, 부동한 지역에 따라 그 용어는 달랐으며

춘추전국(春秋全國)에서 시작된 '장성(長城)'이라는 용어가 가장 통용된다.

 

그것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공사량이 많은 고대 방어 공사로서,

가장 먼저 서주(西周)로 부터 시작하였다.

진시황 이후 만리장성은 거의 불문율이 되어,

중원 지역을 통치하던 왕조는 모두 꼭 한차례 큰 공사를 하였다..

이러한 공사는 춘추전국(春秋全國)시기부터 청나라시기까지 이어왔고 

2천여년의 시간을 걸쳐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만리장성이 결코 진시황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만리장성 하면 진시황을 떠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것과 연관된다.. 

그전에는 이 큰 대륙은 쪼그만한 나라로 분산되었고

각 제후들이 대지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는데,

제초연조위한(齐楚燕赵魏韩) 이것들은 모두 대제후국이며,

또 중산(中山) 등 작은 제후국들이 있었다..

춘추 시대에는 제경전의 크고 작은 제후국들만 보았을 뿐,

다른 하나는 제후국이 백칠십여 개라고 하니,

어느 것이 맞든 이 수가 너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장성을 건설하였지만

각자 자기 영역내 장성만 건설하였고

자의 수비에 따라 필요한 국경을 건설하였다..

 

이때 만리장성의 특징은 동남서북 각각 다르고,

길이도 비교적 짧아, 천리장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후

제국의 안전을 유지하고 보호하기위하여 

만리장성을 수건(修建)하기  시작하였고

즉, 전의 벌크장성을 한군데로 수리하고,

파손된 것을 다시 수리하며,

중간에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최종 서쪽 린토오(临洮)(지금 감숙성니샌尼县 ),

동쪽 요동(辽东)(지금 요녕성)까지

구불구불한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후대에는 이 만리장성을 보수하였거나,

그 위에 필요에 따라 별도로 수리하였다.

2,000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선 장성을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얘기하다싶이

각조대를 내려오면서 수시로 수리하였고

필경 만리장성은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2000여년동안 자주 보수를 하는데

왜 어떤곳은 자꾸 무너질가요?

이건 극히 중요한 원인인데..

그중 다른 원인은 바로 진시황의 역사 재료에서 보다싶이

그때당시 철근 물론 시멘트가 없을때는

사람의 힘으로 의거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옛날사람들도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이 바로 찹쌀이였다.. 

삶은 찹쌀에 모래와 자갈을 혼합하면

끈적임과 효과가 매우 좋았고..

물론 찹쌀만 사용하는거 아니였다고 한다..

고대인들한테 찹쌀은 엄청 귀중한 먹거리였기때문에 

여기에 다른재료들  붉은 흙, 석회, 사석 등의

재료도 넣는데 찹쌀은 소량일 뿐이다..

그리고 만리장성뿐만 아니라

고대 많은 건축물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었고..

효과도 엄청 좋았다고 하였으며

이 방법 외에도 현지 재료를 이용하는 원칙으로,

적재적소(就地取材)를 활용하는 곳이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구조 방법, 조각석,

벽돌 혼합 등 구조방법이 생겨났고

사막에는 홍류 가지(红柳枝条),

갈대와 모래 알갱이가 층층이 깔린 구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명나라시기에 와서는 생산능력이 발전되면서

벽돌제품은 더 이상 사치한 건축자재가 아니였기때문에

명나라시기에 와서 수건한 장성의 많은 곳은  거대한벽돌을 이용하였다..

옛사람의 지혜는 참으로 사람을 탄복하게 하며,

많은 현대설계인들도 이루기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