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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26
    삼국지에서 키가 9척이나 된다는 관운장의 키,, 지금의 어느정도 키가 될가.. 새로 출토된 한나라시기 자(尺)에서 답안이 나왔다고 한다
  2. 2021.03.20
    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3. 2021.02.10
    삼국지에서 <형주荆州>는 어디에 있는곳일가요? 왜서 삼국간 쟁점이 되었을가요?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史记·孔子世家)>에서 공자(孔子)의

키가 9척6촌(九尺六寸)으로 사람들은

<장인(长人-키가 가장 큰 사람)>으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보아하니, 역사상 문성인으로서,

공자(孔子)는 지금까지도 그의 높은 학식이 알려졌을뿐만 아니라,

키도 훨씬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럼 사마천이 얘기한 공자의 키 9척6촌이 현재수자로 하면 얼마나 클가?

공자의 신장(身长)에 대해서 지금까지 두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현대 대다수 학자들은 사마천(司马迁)이 기록한

<사기(史记)>는 서한(西汉)시기였고

그가 얘기한 9척6촌(九尺六寸)은

한나라(汉朝)왕조시기의 자()로 나온 수자였다고 인정하였다.. 

출토된 문물과 일부 역사서적의 기재에 따르면

서한(西汉)시기의 한자(一尺)는 대략 지금의 23.1센치메터정도였다고 하고

이를 계기로 공자의 키를 가늠한다면 약 2.21메터였다고 한다.. 

이정도의 키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고대뿐만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많지 않은 키높이였다.. 

 

위에 해석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 학자들은 공자의 키가 2.21메터 결코 아니였다고 한다..

이분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记)>는 사마천이 한조(汉朝)시기에 만들긴 했지만

그가 수집한 역사자료들은 모두 앞에 조대에서 얻은거였고

공자의 키가 9척6촌이란 수자는 앞에 조대의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가 생활했던 시기는 춘추시기였고 그당시의 한자(一尺)의 수치는

지금의 약 19.7~19.9센치메터정도였다고 하고.

이걸로 기준으로 할경우면 공자의 키는 약 1.9메터 정도였다고 한다.. 

이수자가 맞는것 같다.. 2메터 이상이면 이상할수 있는데

그래도 1.9메터이면 현재사람으로도 엄청난 큰 키였다..

공자의 키가 1.9메터인지 아니면 2.21메터인지..

확실히 정확한 답을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왜냐하면 이두가지 해설이 모두 맞는것 같기도 하다.. 

어느 답안이 가장 정확한지..

아마 고고학자들 더 많은 자료들 찾아봐야 할것 같다..

만약에 어느 하루 고고학자들 공자의 묘를 파괴안한 전제하에서

공자의 남아있는 유해로 키를 가늠한다면 정확한 답안이 나올수도 있다

고대 역사상에서  성인(圣人)이 두분 있었고

그중 한분은 문성(文圣) 공자(孔子)이고

다른 한분은 무성(武圣)관운장이다..

공자가 생활했던 조대는 지금부터 너무 먼 옛날일뿐만 아니라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은 춘추시대여서

공자의 구체적인 키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 ..키가 9척이 된다고 하는 관운장의 키는 현재수자로 어느정도 될가?

 

나관중(罗贯中)은 <삼국지>에서 관운장에 대하여

"키는 9척, 수염길이는 2자"라고 묘사하였고..

그래서 관운장한테 유명한 미염공(美髯公)이란 별명이 생겼다..

고대사람들한테.. 관운장의 9척되는 키는 그의 긴 수염과 함께 유명하였고..

이 키높이는 고대에서는 보기드문 무적맹장군이였다.. 

그럼 관운장의 9척되는 키,, 현대 치수로 어느정도 될가?

마침 새로 발견된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한

자()에서 명확한 답안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 관운장의 키높이에 관련하여 전에 몇가지 해설이 있었고

문물등 물증의 증명이 없는 상태이고

다만 역사책의 기재로 관운장의 키높이를 가늠하기때문에

정확하다고 말할수 없다..

예를 들어 이중톈(易中天) 선생이 관우의 키를 2.07m라고 하는건

그가 참고한 한자(一尺)는 지금의 23.04cm에 해당한다,,

하지만 조조무덤에서 출토된 문물에서 발견한데 의하면

키높이가 7척이 되는 조조의 키는

현재 치수로 그의 실제 키높이가 1.55메터밖에 안된다,,

이 수자가 정확하다면 조조의 키가 저만 하네요.. 

이상태로 계산한다면 관운장의 실제 키높이는 1.99메터정도이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키높이인것이다..

 

이렇게 차이 나는 데는 그냥 각 조대에 따라 한자(一尺)의 단위와 

지금 메터랑 계산이 어떻게 다른가에 따른다..

사실은 사기()에서 관운장의 키높이에 관련하여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관운장의 키가 9척이 된다는건 ..

그냥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뿐이였다.. 

만약에 관운장의 키가 9척이라면

낙양(洛阳)동한(东汉)무덤에서 출토된 자()로 계산해보면

관운장의 키가 대략 2.2메터 정도 된다..

왜냐하면 한나라시기의 한자(一尺)는

지금의 단위로 약 23.4센치메터라고 하고

이는 역사책에 기록된 한자(一尺)의 길이는

약 23.39센치메터 랑 거의 맞는다

 

 

사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맹장이 된 관운장의 키는 작지 않을 것이고,

최소한 2m 안팎일 것이다. 

고고학 무덤에서 출토된 고대인들의 유해는 모두 키가 크지 않았다고 하지만

간혹 몸집이 큰 사람들도 있었고

예컨대 중산정왕 류성(劉勝)의 경우 유승묘에서 출토된

금루옥의(金缕玉衣)를 보면

유승의 키는 최소 1.9m가 넘고 부인도 1.75m나 된다.

 

And

삼국지에서 보면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이중 누구의 실수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유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업을 시작하였고

조조(曹操), 손책(孙策)에 비하면 창업의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빼앗은 대군서주(大郡徐州)도 지키지 못하고

장비로 인하여 잃고 말았다

제갈량을 청해서야 비로소 자기의 발전 전략을 분명히 했고

형주의 적벽대전을 거쳐 형주의 몇개 성을 점유하였으며

또한 손권(孙权)한테서 강릉(江陵--지금 호북성 형주)을 빌려

어느정도 자리매김은 하였다.. 

익주를 공략후 삼고초려 융중대(隆中对)에서

2차 전략을 실현하게 되며 

한중(汉中)을 공략하고 한중왕(汉中王)에 오른 후

유비의 사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관운장이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바람에

유비는 군사를 거느려 이릉에서 오나라한테 참패이후로 

촉한의 사업은 내리막길릴을 걸었다..

유비 죽은후 충칭 백제성에서 제갈량한테 탁고한후

제갈량은 남방을 평정한후 북벌을 시작하였다..

결국 형세가 아주 좋은 상황에서

사람을 부적절하게 썼기 때문으로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고말았고

이로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의 공은 물거품으로 되거 만것이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어떤 실패가 촉나라를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본인 생각은 당연히 관운장의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패전이다.. 

 

1. 장배가 서주(徐州)를 잃을 당시는

유비의 사업이 창업단계였기때문에

이 실패는 유비한테 주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조기에 창업하여,

줄곧 부평초처럼 근거지도 없고,

실력도 별로 없었으며 후에 갈데가 없어 자기 친구였던

공손찬(公孙瓒)한테 의탁을 하였다.. 

유비와 공손찬(公孙瓒)은 한나라왕조 말기에

노식(卢植)의 학생이였다

 

공손찬(公孙瓒) 있는곳에서

유비는 평원령(平原令)이란 작은 관리직을 가졌고..

평원(平原)일때 유비는 계속해서 인심을 매수하여

한 자객이 모두 유비에 감동하여

암살 계획을 포기하게 하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도겸(陶谦)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후,

조조는 서주(徐州)를 도살하였고

도겸(陶谦)은 사람을 여기저기에 보내 구원병을 얻어오게 하는데

오직 유비만이 관운장과 장비를 인솔하여

서주(徐州)로 왔으며 

때마침 여포(吕布)가 조조의 후방에서

소란을 피우자 조조는 그 여세를 몰아 퇴병하였다.

도겸(陶谦)이 죽은후 서주(徐州)의 현지 관원들은

유비를 서주목(徐州牧서주주인)으로 섬겼으며

유비도 기쁜마음으로 서주(徐州)를 다싀게 되었다..

하지만 곧 여포(吕布)가 와서 유비한테 귀속하였으며 

유비도 여포(吕布)를 받았줬다..

마지막 여포는 장비가 술에 취하였고

유비와 관운장은 원술(袁术)과 싸우는 틈을 타 

서주(徐州)를 뺏고 말았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어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말았지만..

이는 유비한테는 큰 영향은 없다.. 

왜냐 하면 나중에 유비가 허도(许都)에서 탈출해

다시 서주(徐州)를 차지하다가

조조에 패전하여  관우마저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다.

 

하여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지 않아도

나중에 조조가 서주(徐州)를 공격하게 되면

유비는 지킬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에 

장비가 잃은 서주(徐州)는

유비의 창업에 주는 영양은 별로 없어보인다.. 

 

 

2. 제갈량은 다섯차례 북벌에서 모두 성공을 못 거뒀기때문에

마속(马谡)이  가정(街亭) 을 뺏긴것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후  제갈량이 국정을 주관하게 되고

제갈량은 유비의 한나라왕조의 부흥 소원을 잊지 않았다.

하여 내정에서 일정한 성과를 걷은후

우선은 남방을 평정하여 안뜰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청두로 돌아온후 유선(刘禅)한테 <출사표(出师表)>를 올렸으며 이

로부터 북벌을 시작하였다

 

제갈량은 처음으로 북벌에 나섰는데,

조위(曹魏)는  어떠한 사상적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조위(曹魏)가 장합(张郃)을 보내 맞설때

제갈량은 마속(马谡)을 보내

가정(街亭)를 지키게 하였는데

결국에 마속(马谡)은 

제갈량의 뜻에 따라 진을 치지 않고,

가정(街亭)을 잃으므로 

제갈량의 첫 북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제갈량이 북벌할 때 군사는

위나라에 10분의1정도밖에 안되었다.. 

병사든 무장이든 병참이든 간에 볼 때

촉한은 모두 열세에 처해 있고,

더우기 제갈량은 안정적 진도를 요구하였기때문에 

일차 북벌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북벌의 성공이 가능하지 않기때문에

마속(马谡)의 가정(街亭)을 잃은것은 대세에 상관없게 되고 

때문에 나중에도 촉한의 운명에 주는 영향은 별로 없어보인다.

 

3. 관운장이 형주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에서

전략를 날려버린것으로  유비한테는 가장 치명적이다

 

삼국지에서 관운장에 관하여 높이 받들고 있는것 같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관운장은 손권의 여몽(吕蒙)장군보다

못해보인다고 생각한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머리 숙일줄 모르고..

사실은 여몽(吕蒙)등 손권밑의 장군들보다

총명해보이지 않은데..

너무 자신감이 넘쳐 날들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비가 한중(汉中)을 공략후 그의 업적은 절정에 이르렀고..

이는 용중대()에서 얘기했던 전략중 두개를 완성한셈이다. 

이제 세번째로 형주(荆州)와 익주(益州)

두 갈래로 북벌에 나서면

장안(长安)과 낙양(洛阳)에서 만나게 되여

유비의 목표가 완전 실현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한중왕(汉中王) 자리에 올랐고 

동시에 관운장, 장비, 마초(马超), 황충(黄忠)을

전후좌우(前后左右)사장군(四将军)으로 임명하였으며

관운장한테는 병사를 컨트롤할수 있는 권리를 줬다.. 

결국에 관운장은 바로 양번(襄樊)전투를 발동하였고..

더더욱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는 7군을 수몰하였고

우금(于禁)을 사로 잡았으며

방덕(庞德)을 죽여 화하(华夏)에 위세를 떨쳤으며

조조는 놀라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손권(孙权)과 신의를 버려 

손권은 여몽(吕蒙)을 보내

백의도강(白衣渡江)하고, 뒤에서 관운장를 기습하였다.

결국에는 관운장은 큰 실수로

형주(荆州)를 잃고 본인도 잡혀서 참살당하였다

 

관운장이 형주(荆州)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의 전략에서

두갈래로 북벌할려는 계획이 파괴되었고

이때문에 이릉대전(夷陵之战)을 유발하였으며

유비의 패전으로  촉나라는 이때부터 내리막길로 달렸다.. 

제갈량은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했지만 힘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관우가  형주를 잃고 촉한의 멸망을  결정짓는다.

 

 

And

삼국지에 형주<荆州>가 자주 등장합니다 

 

무한에서 7년간 생활하면서..

장강삼협 아마 수백번은 다녔던것 같습니다.

호북에서 여행상품으로 장강삼협이 메인상품이고 

삼국지 코스도 많이 다녔어요.. 

장강삼협 크루즈는 대부분 의창에서 승하선하고.. 

가끔 형주부두에서도 승하선 할때도 있지만

극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형주는 무한에서 의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하였고..

(무한에서 의창까지 330키로정도이고

무한에서 형주까지100키로정도 됩니다. )

삼국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서 의창에서 하선후 형주는 꼭 들려

형주고성과 형주박물관이 필수 코스였습니다. 

형주는 삼국지와 연관되기도 하고 초(楚)나라 수도였던

기남성(纪南城)이 형주부근의 봉황산에 있어요

기남성(纪南城)에서 초장왕(楚庄王)의 무덤을 발견하였고..

발굴된 많은 문물들이 형주박물관에 진렬되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해서인지.. 박물관을 엄청 좋아했어요.. 

다녀봤던  박물관중 호북성박물관과 형주박물관이 가장 좋아했고.. 

(성도 금사유적지랑 삼성퇴박물관도 괜찮긴하지만)

예전부터 호남성 박물관에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그냥 스쳐가버려서,,나중에라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서안 병마용은 어마어마 하긴 하지만..

글도.. 저는 형주 박물관이 좋습니다. 

 

형주박물관에는 초나라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기(춘추전국시기 초나라의 청동기가 가장 발달되었습니다.),

칠기(인류최초칠기만듬), 실크(인류최초 실크 발명), 미이라등 전시되어 있어요..

 

다시 주제로 돌아와 오늘은 <형주>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삼국지에서 형주(荆州)가 엄청 중요한 곳입니다. 

조조가 남하하여 <적벽대전>의 발동의 목적은

바로 형주(荆州)를 점령하기 위해서이고

손권이 여동생을 유비한테 시집보내는 목적도

형주(荆州)를 돌려받기 위해서입니다. 

여몽(吕蒙)이 흰옷차림으로 강을 건느는 사건과

관운장 매성(麦城)으로 패주하는 사건

마지막 유비 대규모로 동오(东吴) 대대적으로 공격하면서..

이릉(夷陵--지금의 의창시)대전에서 패전하는 사건 등등도 모두 형주때문입니다. 

함으로 삼국지 후반부에서 형주(荆州) 쟁탈전을 에워싸고 전개 되었고..

형주(荆州)는 엄연히 삼국에서 가장 중요한 한 축이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형주(荆州) 는 왜 이렇게 중요했을가요?

또 삼국지에서 나오는 형주(荆州)는 오늘날 호북성 형주(荆州)시일가요?

 

형주시에 가면 시내 들어가기전 이런 성문이 보입니다. 

▶1. 형주(荆州)의 지리적위치

형주(荆州)--지금도 이 이름으로 되어 있는 도시가 있고

바로 호북성 형주(荆州)시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형주(荆州)를  이곳으로 생각하죠.. 

 

사실상 삼국시기의 형주(荆州)는 어느 한 도시가 아니고

큰 지리적영혁으로 .. 한국의 도 랑 비슷합니다.

동한말년 천하는 13개주(13개성)으로 분활되었고

형주(荆州)는그중 한개 주 였던것입니다.

지도에서 보면 형주(荆州)의 범위는 호북성과 호남성 전체가 들어가고

하남성 남쪽 엄청난 면적이 포함됩니다. 

삼국시기 형주(荆州) 관할하에는 모두 7개군이 있고

그기에 남양군(南阳),남군(南郡), 

강하군(江夏郡), 무릉군(武陵郡), 장사군(长沙郡),

령릉군(零陵郡)및 계양군(桂阳郡)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표(刘表)가 형주(荆州)정권을 장악하고 있을무렵에

형주(荆州)의 소재지는 지금의 호북성 양양시(襄阳市)였고..

지금의 형주(荆州)시가 아니였습니다.

지금의 형주(荆州)는 삼국시기에 강릉(江陵) 이라고 하였습니다. 

 

▶2. 형주의 정권 교체

형주(荆州)는 삼국시기에 누구한테 고정되지 않았고..

마치 핫하고 군침이 도는 케이크마냥

군웅(群雄)들한테 뜯기거나 쟁탈되는 곳이고..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이역 횟수를 기록한 영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류표(刘表) 정권을 장악할때(190년--199년)

서기 190년에 류표(刘表) 는 형주(荆州)정권을 장악하면서

아울러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이어 형주(荆州)6군()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북부에 위치한 남양군(南阳郡)은 초기에 원술(袁术)이 차지하고 있다가 

후에 원술(袁术)이 패전하여 죽은후 류표(刘表) 도 남양군(南阳郡)을  차떼기하였고

이로써 형주(荆州)7()은 거의 류표(刘表)에게 넘어갔습니다

2.손권(孙权)이 강하(江夏)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남양(南阳)을 점령하였습니다.(199년--208년)

서기 199년 완성(宛城)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장수(张绣)는 조조한테 투항함으로

남양군(南阳)는 서서히 조조의 통제에 들어갔었습니다. 

남양군(南阳)은 조조와 류표(刘表) 사이를 수차례 오가며 일진일퇴를 벌였습니다.

208년에 이르러 손권(孙权)은 아버지 복수를 위하여

강하(江夏--오늘 무한의 무창)의 장조(张祖)에 향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고

강하(江夏)를 통제하였습니다. 강하(江夏)는 장강 이남에 위치하였고 오늘날 호북성 무한 무창입니다.

여기까지 형주 7군()에서 남양(南阳)는 조조한테 뺏기고 

강하군(江夏)은 남부 손권(孙权)한테 뺏기므로 류표(刘表)한테는 형주5군()만 남았습니다. 

3. 조조 남쪽으로 내려오고 류종(刘琮)은 투항하다(208년)

208년7월 조조는 군사를 거느려 남쪽을 내려오면서 형주(荆州)를 진공하였고 

류표(刘表)는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류종(刘琮)이

형주(荆州)5군()을 갖고 조조한테 투항하였습니다. 

유비는 신야(新野)에서 패전하여 하구(夏口--오늘 무한시 한양)로 후퇴하였으며

이때 형주7군()은 강하(江夏-지금 무한 무창)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는 모두 조조한테 통제퇴고 말았습니다.

 

4. 적벽대전(208년--209년)

208년 12월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전하여남양군(南阳郡)으로 후퇴하였고..

오나라 주유(周瑜)는 군사를 거느리고 남군()을 진공하여 점령하였으며

유비는 바로 형주남부4군()을 뺏어 점령하였습니다. 

 

5. 유비 형주(荆州)를 빌려가다

이때 유비는 공안(公安--현재도 公安현으로 형주시에 소속되어 있습니다.)에

주둔하여 발전에 불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손권(孙权)한테 남군(南郡)을 요구하였고..

로숙(鲁肃)은 손유(孙刘)동맹을 고려하여 

손권(孙权)보고 남군(南郡)을 유비한테 빌려주라고 하여.. 

유비는 형주5군()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6. 유비는 사천에 들어갔고 유비와 손권은 상강(湘水)을 경계으로 하였습니다.(215년)

215년 유비는 익주(益州)를 뺏은후에

손권(孙权)은 유비한테 형주(荆州)를 요구합니다. 

유비는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하기 위해서

장사군(长沙郡), 계양군(桂阳郡)을 손권(孙权)한테 돌려주고

유비와 손권(孙权)은 상강(湘水-호남성에서 가장 큰 강)을 경계로 하여 형주를 갈랐습니다. 

이때 유비와 손권(孙权)은 각자 형주(荆州)3군()을 점령하였고

남양군(南阳郡)은 여전히 조조한테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7. 관운장이 실수로 형주를 잃는다(219년)

219년 여몽(吕蒙)은 강릉(江陵-지금 호북성 형주)을 기습하여

남군(南郡)을 공격하였고.. 

형주의 무릉군(武陵郡), 령릉군(零陵郡)도 소문을 듣고

동오(东吴)에 항복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운장은 매성(麦城-호북성 당양시에 소속된 한 진이고

지금도 麦城이라고 합니다. )에서 패주하여 포로가 되어 죽습니다. 

이때 형주7군은 조조가 차지하고 있는 남양군(南阳郡)외

머지 6군()은 모두 손권(孙权)이 점령하였으며

유비는 형주(荆州)를 철지히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되면 삼분천하의 구도가 이미 전면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확실히 형주(荆州)는 삼국 시대에 가장 핫했던 땅임을 알 수 있는데..

형주(荆州)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가요?

 

▶형주(荆州)의 중요성

형주(荆州) 중요성을 3개 방면으로 얘기해봅니다. 

지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수 있는데

동한(东汉)13개주 가운데.. 형주(荆州)의 면적이 비교적 크고 

북방의 연주(兖州), 서주(徐州)에 비하면 형주(荆州)는 면적이 광활하고

더욱이 돌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강한평원은

군벌이 할거하는 데 절호의 기반으로 됩니다. 

자고로 호북지역에는 선비들 많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이지역 이상하게 유명한 인물들도 많이 나오고 모이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동시에 형주(荆州)의 인구는 다른 주에 비하면 가장 많고

역사책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말년 형주의 인구는 620만명이였고 

원소(袁绍)가 통제했던 기주(冀州)의 인구는  590만명이며,

도겸(陶谦)이 통제했던 서주(徐州)의 인구는 280만명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주(荆州)는 토지면적과 인구에서 다른 주에 비하면 월등함으로

삼국란세속에서 제후들한테 안정된 식량과 병력 자원을 제공할수 있습니다. 

동시에 형주양번(荆州 襄阳) 지역에는 자고로 부터 유명한 사람들 많이 나와

인재자원도 풍부합니다.

류표(刘表)가 형주(荆州)를 껴안고 다른 지역을 탐내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두번째는 형주(荆州)는 장강상류 수로를 차지 하고 있는 우세

알다싶이 중국 역사상 많은 남방의 할거 정권이 출현하였고.. 

여기에 손오(孙吴), 동진(东晋), 남조(南朝)의 송계량진(宋齐梁陈)등등이 있었고

모두 장강의 천험한 요새에 의지하여 방어를 진행하였고.. 

물살이 센 장강은 항상 용호가 서리고 걸터 앉는 곳이며

냉병기 시대에는 확실히 더할 나위 없는 천연 장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요새의 약점도 있는법입니다.

만약에 장강상류의 형주(荆州)를 통제할경우면

강따라 내려가면서 남쪽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주는 강남 정권과 북방 정권이 맞서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었고 

북방정권은 형주를 통제하면 남쪽을 쉽게 손아귀에 넣을수 있고 

남방정권에서 형주를 통제하게 되면

장강의 장벽을 튼튼히 세우고 천혜의 요새에 의지해 방어할 수 있습니다.

형주는 장강의 상류수로를 점유하고 있기때문에 가장 중요한 지리적위치입니다. 

 

세번째는 형주(荆州)는 양양(襄阳) 통로를 지켜 병가가 반드시 쟁탈해야 할 곳이다.

우리가 다 알다싶이 중국은 북방과 남방으로 가르게 된데는 

중간에 위치한 자연분계선이기때문이고..

이 자연분계선이 바로 <진령산맥(秦岭山脉)--대별산산맥(大别山山脉)--황허(淮河)>입니다

이 분계선은 엄청 험준한 산과 강으로 조성되어서 

냉병기 시대의 군사전쟁에는 천연적인 방어벽이었고

그 경계선 위에 단 한 개의 들어가고 나갈수 입구는 바로  양양(襄阳)입니다. 

지형지도에서 보면 양양(襄阳)의 서쪽변두리는 진령산맥(秦岭山脉)이고,

동쪽변두리는 대별산산맥(大别山山脉)입니다.

양양(襄阳)은 이 두 산맥의 대문같은 역할을 하면서..

남북을 연결시켜주며 남양(南阳)분지와 강한평원(江汉平原)을 연결시켜주기때문에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할수 있습니다. 

 

종결어

<삼국지>를 읽으면서.. 저 개인적으로 촉한정권의 몰락은 엄청 아쉬웠습니다. 

제갈량의 성공직전의 실패로 엄청 아쉬웠고..

사실 이 모든 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형주에서 비롯됐죠.. 

일찍이 유비 <삼고초려>에서 

제갈량은 <隆中对>에서 완벽하게 장래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줬는데

천하가 변하면 상장(將將)이 형주의 군대를 향해 완(宛)과 뤄( 洛)를 향하게 하고,

장군이 익주(益州)의 많은 사람들를 진천(秦川)에서 거느리면 패업(覇業)이 가능하고,

한실(漢室)이 흥한다고 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유비, 장비, 관운장이 너무 자기주의고 제밖에 모르고

고집이 너무 강했던것 같았으며

만약에 제갈량이 계획한대로 나갔으면 제갈량의 구상한대로 될수도 있었는데..

유비의 능력과 이해력이 너무 부족했던 탓이기도 하고..

유비한테 제갈량은 너무 아까웠습니다. 

손권이나 조조에 비하면 유비는 그냥 아무도 모르는 어리애 혹은 시골농민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에 유비는 전국을 통일할려면 제갈량의 초기 구상대로.. 

반드시 병사를 두팀으로 두갈래길로 조위(曹魏)를 진공해야 했었습니다. 

한갈래는 한중(汉中)에서 출병하여 장안(长安)을 진공하고

다른 한갈래는 형주(荆州)에서 출병하여 낙양(洛阳)을 진공하는겁니다. 

두 방향에서 동시에 큰 진공을 하면 두

조위(曹魏) 수미(首尾)가 함께 돌볼 수 없게 해야만

한 방에 반드시 승리하여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나 그 비전은 모두 형주의 잃으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죠

그러므로하여 제갈량은 그냥 작은 익주(益州)를 지키고 있어야 하고 어렵게 다른 두 강대한 정권과 싸워야 했고.. 제갈량의 아무리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유비가 갈망하는 <한실을 다시 일으켜 중원을 극복하다.>는 목표는 물거품을 되고 만겁니다.형주, 이렇게 3국의 흐름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시대의 가장 큰 바둑돌이 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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