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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6개국을 멸하고
화샤(华夏)를 통일한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하지만 통일한 진나라왕조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진시황이 죽고난후
2세에와서 몇년안지나
진(秦)제국은 다시 살아나는 6개국의 힘에 의해 무너졌다.
여기서 <6국>은 완전에 소멸되지 않았음을 뻔하게 느껴지고
6국(제초연한조위 齐楚燕韩赵魏)의 분단 역량과 생명력이 매우 강인하여,
실제로는 화샤(华夏) 통일 프로세스의 대항자이자 전복자가 되었다.
즉, 6개국의 복벽력을 근원적으로 소멸시켜야만
화샤(华夏) 의 진정한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는 판도 형식뿐 아니라 고대 국민의 국족적 공감대도 포함한다.
>>진새황의 통일은 한때 파괴를 받았다..
전국(战国)후기 시작하여 진시황의 전국통일과정이 전개되면서
먼저 멸망된 6국은 이미 복벽(复辟)의 힘이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복벽 역량(复辟力量)은,
남아 있는 6국의 왕족·귀족·장령뿐 아니라,
원래 6국 통치하의 일반 백성들도 포함하였다.
이런 복벽의 힘复辟力量)은 무력에 있지 않고,
6개국 유민의 국가 정체성이다.
제(齐) 나라왕조 같은 경우 역사상에서
일찍이 연나라(燕国), 진나라(秦国) 및
항우(项羽)에 의하여 정복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제나라(齐国)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는 훗날 제나라(齐国) 다시 일어날수 있는
가장 관건적인 기초로 된다고 생각한다..
<田横五百壮士탠앤헝 500용사>라는
스토리에서 슬프고 아름다웠지만
제나라(齐国) 사람들의 완강한 추구는
제나라(齐国)를 다시 일쿼세우고
그 나라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 6국의 복벽의 힘(复辟力量) 은 언제쯤 깔끔하게 소멸되었고
고대 중국 진정으로 화샤(华夏)통일은 언제로 인정될수 있을가?
진시황은 당연히 완성못했다고 생각하고
서초(西楚)패왕(霸王), 항우(项羽)는 더한 역륙주였다
그럼 한고조유방(汉高祖刘邦)은 했냈다고 할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면
유방(刘邦)은 3분의2를 완성하였다고 생각된다
진나라왕조가 멸망시기
항우(项羽)는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대분봉(大分封)"을 진행하면서
다시 전국(战国)시기의 6국이 회복되었고
심지어 더 많아졌다..
여기에 한왕(汉王), 하남왕(河南王), 웅왕(雍王),
싸이왕(塞王), 구강왕(九江王), 은왕(殷王) 등등
12개 왕국을 더 추가하였다..
항우(项羽)의 분봉(分封)은 6국이 다시 회복될수 있는
희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켰고
반면 화샤(华夏) 정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6국의 복벽력(复辟力量)은 <일가일성(一家一姓)>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항우(项羽)도 약간의 긍정적인 작용을 하며
그것이 바로 6개국의 왕족들이
왕위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타파하여
여러명의 밑바닥 출신 장수들도 역시 왕이 되었고
이로서 진승오광(陈胜吴广)의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王侯将相宁有种乎)>의
정신을 관철시켰다..
유방(刘邦)이 항우(项羽)를 소멸시켰을 때,
또 연이어 다수의 이성왕(异姓王)을 제거하였고
여기 이성왕(异姓王)에는 제나라(齐国)뿐만 아니라
조나라(赵国), 한나라(韩国) 등 옛왕족들이 있으며
그외 한신(韩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천희(陈豨) 등 한나라 장군들도 있었다..
항우(项羽)와 유방(刘邦)의 이러한 거동은
6개 국의 대물림을 상당 부분 혼란시켰고
6개국의 복벽 역량(复辟力量)에 대한
구유정체성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6 개국의 복위 역량에 있어서,
왕위의 법통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제후국 하나를 복위하자는 호소의 핵심이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당연히 6개국
구 제후왕의 직계 후손이고
그담은 6국왕족의 방계 후손이다..
가령 초나라(楚国)가 복위할 때의 초회왕(楚怀王) 라든가
한나라(韩国)가 복위 당시 한왕성(韩王成)과
한왕신(韩王信), 조나라(赵国) 복위 당시의 조왕헐(赵王歇),
위나라(魏国) 복위 당시의 위왕책(魏王咎)과 위왕포(魏王豹) 은
모두 구초왕(旧楚王), 구한왕(旧韩王),
구조왕(旧赵王), 구위왕(旧魏王)의 직계후손이며
기본은 모두 공자 신분이다
한편, 제나라(齐国)가 복위할 때의
전담(田儋)·전영(田荣)·전횡(田横)은
구제왕의 방계(方系)인 친척일 뿐이다.
하지만 6개국의 왕족과 법통이 깨진 후
6개국의 복원의 힘은 이러한 구왕족한테
의탁하기는 엄청 어려운 일이 되었고
한발 물러나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할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과거에 제나라왕과 초나라왕으로 했었던
한신(韩信), 또 연나라(燕王)왕
천희(陈豨), 량나라(梁王)왕 팽월(彭越),
조나라(赵王)왕 장얼(张耳) 등 분들이
바로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했던 것이다..
한신(韩信)이 여러 차례 반한(反漢)의 자립을 부추긴 것은
구 6개국 복위의 힘이 형식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한조(汉朝)의 대다수 이성왕(异姓王)이 숙청된후
각지역의 제후왕들은 모두 유씨(刘氏)의 자손으로 변해버렸으므로
6개국의 복원의 힘이 이로서 소실된거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정반대로 이런 낡은 '6개국 인정'이
다시 이들 유씨 자손들에게 기탁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경제(汉景帝) 시대의
'칠국지란(七國之亂)'으로,
진(秦)말의 분열 양상을 거의 재현했다.
여기서 보다싶이 6개국 복원희 힘은
<일가일성(一家一姓)>의
충성을 개의치 않다는걸 볼수 있고
어떤 지방의 횡포 이익에 부합된다면,
제후는 성은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제나라(齐国)의 군주가 변천한 것을 보고,
이 점을 깊이 깨닫게 되고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제나라(齐国)왕 국주의 성시는 강(姜)씨였고..
전국(战国)시기에 와서는 전(田)씨로 바꿨으며
초한(楚汉)의 패권 다툼 때 일찍이 한신(韩信)이 충당하여
서한(西汉)시기에 와서는 류(刘)씨성으로 바꿨다
비록 로열 패밀리일지라도
제나라(齐)왕계의 몇 명의 제후(诸侯)<제남왕류피광(济南王刘辟光),
쯔촨 왕류현(淄川王刘贤), 죠오시왕류앙(胶西王刘卬),
죠오둥왕 류웅구(胶东王刘雄渠)>.
들은 여전히 <칠국의란(七国之乱)>에 참여했던
중요요원들이였다..
>> 구유분봉 체계를 종결한 것은, 한 무제(汉武帝)의 추은령이었다.
6개국 복원 역량에 대해 철저히 '부저추신(釜底抽薪)'하지 않으면,
일부 지방 세력의 분열 경향을 없앨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나라왕조(汉朝) 역시 화샤(华夏)의
진정한 통일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할수 있고
특히 민족 의식의 통일이다..
사실상 결국 낡은 할지(割地) 분봉(分封) 사상을 타파하고,
화샤(华夏) 민족 의식의 대일통을 완성하였으며
이 임무는 한무제(汉武帝)가 진짜로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한무제(汉武帝)의 방법은 바로 <추은령(推恩令)>이였다..
"추은령(推恩令)"은 겉으로는
각지역 제후(诸侯)의 왕권을 불할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제후국(诸侯国)을 점차적으로 산산히 쪼각쪼각 냈으며
그들의 다수 군사 정권 권력을 완전히 박탈하였고
경제권만 남겨줬다..
한무제(汉武帝)이후로 지방제후(诸侯)는 더 나아가서
그냥 아무 권리가 없는 허직으로 변화시켰고..
이제 더는 지방 령주(领主)들이 아니다..
이번 행동은 각지의 백성들이
제후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타파하였고
일반인들이 제후에게 충성할 수 있는
법리적 토대도 잃어버렸으며
'조정과 황제에 충성하고'를
일반 백성들의 최종 선택지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6개국의 복벽 역량은 마침내 물 되어 버렸고
더 이상 이런 '총중고골(冢中枯)'을 그리워할 사람은 없게 되었다
어떤 지방의 부호들은 이러한 중앙의 관리에 불만은 있었지만
더는 <복국의구호>를 내세울수 없게 되었으며
봉기된 명분도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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