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04)
중국스토리 (54)
삼국지스토리 (8)
기타역사스토리 (8)
음식 및 맛집 (5)
그냥 (33)
자유게시판 (4)
백두산여행 (26)
다른지역여행 (18)
백두산맛집 (1)
다른지역맛집 (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1. 2021.03.22
    중국 고대 4대 미녀는 익숙하지만.. 원빈처럼 잘 생긴 고대 4대 미남들은 없었을가요?
  2. 2021.03.21
    가장 약한 한국(韩国)이 무슨 근거로 전국칠웅(战国七雄)이 될수 있었을가?
  3. 2021.03.13
    개봉(开封)에 있는 유대인들은 어떠한 그룹이였을가? 이스라엘은 왜 그들이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4. 2021.02.25
    중국역사상 역사상 개국황제(开国皇帝)들,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될때 나이비교
  5. 2021.02.22
    곽거병(霍去病)도대체 얼마나 강했을가요?3년에 흉노를 10만 명 죽였다.. 그의 인생은 2천년기간 어느 누구도 카피 할수 없었다고 한다..
  6. 2021.02.21
    <6국을 완전 멸하고>화하(华夏-중국옛명칭)를 최종 통일한 사람은 한무제(汉武帝)이고 진시황은 아니였다..
  7. 2021.02.18
    현대사회에서 공식휴가 있는것처럼 옛날 왕조시기에도 휴가가 있었답니다.
  8. 2021.01.31
    측천무--왜 자기 소중한 딸을 목 졸라 죽여 왕황후를 모함해야 했을가.. ? 질투?아님 증오?

중국고대 4대미녀는 누구도 잘 알고 있는 사실..

필경 미인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도 있는듯하고..

미녀가 어디로 가든 항상 눈에 띄기 마련이다.. 

오늘은 미녀 말고.. 중국 고대 4대 미남.. 누구누구 있을가?

 

4대미남중 한사람은--판안(潘安)

역사책에서 판안(潘安)의 용모에 대해

미자의(美 仪儀)는 사람의 외모와 기품,

기품 등이 뛰어나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说新语)>의 기재따르면 :

"판안(潘安)은 자태가 아름답고 표정이 은은하여

보는 사람 빠져 들게 하고 어릴때는 락양(洛阳)거리에서 다니면

여자들과 마주칠때면 모두 손을 대며 매달렸다. "고 말했고 "

"안인지미(安仁至美) 매 행마다 노파(老妪)가 과일을 던져 수레를 가득 채웠다." 고 하였다..

뜻은 판안(潘安)이 매번 외출하게 되면 항상 많은 여인들 뒤에 따라다니고

다들 서로서로 손을 잡고 그를 에외쌓다고 하며

꽃도 갖다 주고 과일도 판안(潘安)의 차에 올려주면서

자신의 사랑을 표달했다고 한다.

만약 지금같았으면 정신병으로 상대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시대의 산물이며, 서진(西晋) 여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가 매번 외출하여 집에 들어오면 수레에 과일을 가득 채워오는데 

'과자영차(掷果盈车)'라는 성어가 여기에서 왔다.

판안(潘安)이 있는 서진(西晋)은 전 국민이 상미(尙美)하는 시대이며,

남색에 대한 욕구가 너무 미쳐 이미 현대를 능가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미남자의 기준은 체구가 크고 입술이 붉으며 이가 하얗다는 것이고

두루마기 차림이지만 대개는 소매가 헐렁헐렁해 시크한 느낌을 준다.

 

판안(潘安)은 정에 있어서 변치 않고 아내 돌아간후 다시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으며

봉건사회에서는 남자들 몇명의 첩이 있는건 당연한 일인데..

이분은 사랑에 대한 충성심은 참으로 대단하였다고 한다..

아내 세상을 떠난후 그는 세 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悼亡诗)》를 창작하였으며 

중국역사상에서 이 삼수 <죽음을 애도하는 시 (悼亡诗)>는 개척의 의의를 가지고 있어,

이로써 그의 재능과 학식도 상당히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뛰어난 외모와 지극한 효성,

뛰어난 인품과 재성을 지닌 사람을 '중국 고대 최고의 미남자'라고 일컫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미남은: 송옥(宋玉)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송옥(宋玉)의 재능,판안(潘安)의 용모> 라고 있다.. 

송옥(宋玉)은 여자들이 그를 보면 모두 그에게 반한다고 하며   

용모가 아름답다는 설이 천고에 전해지고 하지만

그가 어떻게 잘 생겼는지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그림 한 장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옥(宋玉)은 결코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그는 대시인 굴원(屈原)의 제자이며, 대사급 문장가로서,

많은 남버원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그는 첫 번째로 비추(悲秋)를 썼고, 첫 번째로 여성에 대해 썼다.

그의 《신녀부(神女赋)》 중의 신녀는,

선진(先秦)의 여성미 관념을 구현하였고

그의  명품 작품인  '신녀부(神女赋)'와 '고당부(高唐赋)'는

무산(巫山-장강삼협에서 크루즈 타고 내려오면 무산이랑 도시를 경유하게 된다)의

여신(무산신녀(巫山神女)-

장강삼협의 협곡 12봉우리중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신녀봉을 가르킴)의 미모를

수천 년간 후인들이 탐을 내도록 묘사했다...

그는 지금까지 16편의 작품이 전해져 내려왔으며 그중 <구변(九辩)>은

그의 작품임을 확신하고,

중국 문학사에서는 굴원(屈原)의 《이소(离骚)》에 견줄만하여,

초사(楚辞) 중의 쌍벽이라 할 수 있다.

 

송옥(宋玉)의 생애 대하여 기록된건 별로 많지 않고..

다만 그가 엄청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고..

자기의 발전의 위하여 초나라왕의 신변에서 문학시중으로 일을 하였으며 

초나라왕이 많이 알아줬다고 한다.. 

결국 조정을 떠나 다시 시골로 내려가 아쉬움 가득한 한을 안고 생을 마감합니다.

 

 

세번째 미남은: 혜강(嵇康)

혜강(嵇康)은 자가 숙야(叔夜)이며

초군추현(谯郡锤县)(지금의 안후이성 쑤저우(安徽宿州)) 출신. 

조상의 성은 시(), 우인을 단속할 것이니,

원한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죽림칠현(竹林七贤)>의 선두이다.. 

그는 삼국시기의 유명한 시인이고 음악가이며

현학(玄学)의 대표적 인물이다.

 

혜강(嵇康)은 박식하고 재능이 많으며 음악에서도 신동이다..

그는 <금부(琴赋)>에서 : "흔하지 않은  좋은 소리,

길게 여운을 남기는게 익숙해졌고,

흥하고 망하는거에 따라  그기에 대한 감정이 변화되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 감정은 전혀 변화가 없으며 ,

,또 맛이 싫어지는경우도 있지만

이것만은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금의(琴议)>에 기재된 문장은: 혜강(嵇康)이 전에

뚜멍(杜猛)한테 <광릉산(广陵散)>을 배웠고

그는 이 음악을 엄청 사랑했으며 자주 연주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가르침을 부탁했었지만

혜강(嵇康)은 전수하지 않았다...

최후 그는 그당시 권력자였던 사마씨(司马氏)와 원수로 되었고

결국에 목숨을 잃는 재앙을 초래하였다..

사형당하기 직전 3천명의 태학생(太学生)들

그를 위해 사정을 했지만 결국에는 면하지 못했다

혜강(嵇康)이 임종시 <광릉산(广陵散)>곡을 연주하면서

'광릉산(广陵散)'은 이제 끝이다라고 길게 한탄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40세였다... 

그의 외모는 아마 판안(潘安)이나 송옥(宋玉)보다 못하겠지만

그가 몸에 지니고 있는 기질은 오히려 누구과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네번째 미남: 란릉왕(兰陵王)

<북제(北齐)서주(徐州)란릉군왕(兰陵郡王)

--고장궁(高长恭)>

 

고장궁(高长恭)의 본명은 고숙(高肃)  고효관(高孝瓘)이라고도 하였으며

자는 장공(长恭)이다....그의 아버지 고등(高澄),

할아버지는 고환군(高欢均)이였으며

동위왕조(东魏王朝)선학일(煊赫一)때의 권신이였으며

북제(北齐帝国)제국의 창시자, 중국고대 4대 미남중의 한명이다..

 

란릉왕(兰陵王)은 출정 과정에서 용모가 아름다워

적의 비웃음을 살 때가 많아 고민이었고 

하여 그래서 헬멧을 개조하여 '험상 궂은 얼굴 가면'를 만들었으며

이는 란릉왕(兰陵王) 가면의 유래가 된다..

후세에 많은 란릉왕(兰陵王)의 형상은 가면을 착용한모습으로 나온다..

그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검을 쥐고 용맹하게 적을 물리쳤으며

<험상 궂은 얼굴>가면으로 적군들이 공포를 떨게 하였고 

헬멧을 쓴 <마귀>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공을 많이 세웠지만 랑릉왕(兰陵王)은

결국에는 꼭 같이 황제의 의심과 살심(杀心)을 당했고 ..

릉왕(兰陵王) 자신도 용퇴할 것을 알고,

조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어떻게 하면 황제의 불신을 피하고

그런 식으로 멀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는 알지 못했다.

 

결국에 북제(北齐)왕조 무평(武平) 4년(573년)5월,

황제는 사람을 보내 독주 한잔을 랑릉왕(兰陵王)한테 주었고

란릉왕은 독주를 다 마시고 나서 사망하였으며

이로서 북제(北齐)제국의 마지막 황족 명장이 쓰러지고 말았다.. 

수차례 난관에 부닺친 나라를 구한 용맹한 북제의 신과 같은 장군은

끝내 전장에서 전사하지 못하고

가족 내 싸움에 휘말려 북제국(北齐)의 종말이 오기 전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란릉왕(兰陵王)이 사사된 지 4년 만에

제후주(齐后)는 결국에 자기절로 

자기 팔을 자른 악과(惡果)를 맛보게 되었고 

북제제국은 망하고 말았다

 

정사에서: "만약에 란릉왕(兰陵王)이 죽지 않았으면

북제(北齐)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결국에 완전 와해 되었으니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고 한탄 하였다.. 

 

 

And

제초진연조위한(齐楚秦燕赵魏韩)

역사상 전국7웅(战国七雄)으로 불리고 

춘추오패(春秋五霸)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나라마다 한군데 한군데의 하이라이트가 있으며

아무리 나약한 연국(燕国)이라도

또한 락의(乐毅)가 5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벌제(伐齐--제나라 공격)할 절정의 순간도 있었다..

오직 한국(韩国)만이 별다른 존재감이 보이지 않았다



<사기.한세자(史记·韩世家)>를 잃어보면

한국(韩国))은 많은 전쟁에 참여했다는걸 발견할수 있지만

대부분은 침략을 당하는 상대로만 나오거나 한다..

가장 많이 나오는 문구에는 "진발아(秦拔我)xx",

"진벌아(秦伐我)", "위패아(魏败我)", "위공아(魏攻我)"…

 

기원전260년 진나라()와 조나라()는

한국(韩国)의 상당지역(上党地区)을 쟁탈하기 위하여

장평대전(长平之战)을 벌렸으며

죽도록 싸우다가도

주인인 한국(韩国)은 공포에 질려 숨죽이고,

그 광경은 러일전쟁에서의 청나라왕조와 같았다. 

 

지도상에 보면 한국(韩国)의 국토 면적은 많이 작았으며

9만평방키로 정도밖에 안되어 칠웅(七雄)중에 가장 작았고..

초(楚国)나라의 5분의 1도 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韩国)은 가장 중심에 위치하여 항상 침략을 받았다..

 

면적이 가장 작고 여기저기서 침략받는

한국(韩国)이 무슨 근거로 칠웅(七雄)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1.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부족하지만

못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나은 편이다..

 

한국(韩国)의 세력은 약하지만

세 집이 아직 분진되지 않았을 때는,

한국(韩国)은 잘 나갈때였다..

기원전385년 한국(韩国)이 정국(郑国)을 진공하여

바로 양성(阳城)을 점령하였고

기원전 380년에는 제국(齐国)이 혼란스러움을 이용해

한국은 군사를 거느리고 상구(桑丘)를 공략하였으며

기원전 376년에는 한상후(韩哀侯)와 조위(赵魏)와 진국(晋国)을 나눠가졌다..

또 다음해 그러던 중 정국(晋国)을 통째로 삼켜 버리고

신정(新郑)으로 도성을 옮겼다.

 

춘추시기 송정(宋郑) 이 나라는 그냥 이류세략이였고..

한국(韩国)이 그들을 소멸할수 있다는건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2. 지형적으로 가져온 우위

 

한국(韩国)의 국도는  동에서 림주(林州)에서부터

서쪽으로 한성(韩城)까지,,북으로는 장야(长冶)에서부터

남쪽으로 심양(沁阳)까지로산서(山西)성의 전체,

하남성(河南)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산서성의 일부분은 여량산맥(吕梁山脉)과 태항산맥(太行山脉)사이였다..

조위한(赵魏韩) 세집이 진()나라땅을 나눠가질때

한국(韩国)의 승상 단귀(段规)는 한강자(韩康子)한테 귀띰해줬다.

."땅을 나눌때 꼭 성고(成皋)를 요구하라고"고 하였다..

한강자(韩康子)는 의아하여 물었다.

"성고(成皋)는 인가가 없어 풀 한 포기도 나지 않는데,

안좋은 땅을 가져서 뭘 하겠느냐?"

단귀(段规)는 답하기를

"면적은 크지 않지만 천리의 지역을 잃을수 있는 결정과

연관되므로 지세에서 유리합니다..

만명으로 삼군을 공략할수 있으며

만일 제 제안을 받아드리신다면

한국(韩国)은 꼭 정국(郑国)의 땅을 뺏을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성고(成皋)는 한국(韩国)이 정국(郑国)을

멸망하는 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도 중요한 완충지가 되었다는 것이

단귀(段规)의 말이다.

 

한국(韩国)은 삼천군(三川郡)과 상당군(上党郡)이 굳게 연결되었고

또 두개 큰 산맥을 등지였으며

으로는 황하가 지리적으로 훌륭한 방벽으로 되어

자연적인 전략적 월등함을 갖고 있다..

 

 

3. 변법은 부강하고, 과학 기술은 부강하다.

 

기원전 351년 한소후(韩昭候)는

법가(法家) 신부해(申不害)를 승상자리에 앉혔으며

이때부터 한국(韩国)에서 변법(变法)을 전개되었다..

 

신부해(申不害)는 일련의 조치를 전개하여

군주의 집권을 강화하였고..

우선으로 먼저 한국(韩国) 내부의 협씨(侠氏),

공리(公厘), 단씨(段氏) 등 3대 강족에 부터..

내부 조사를 시작하였고

그들의 특권과 토지를 회수하여 재산을 정리하고

국고를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 '견공행상(見功行賞)으로 관직을 수여한다'고 했다. 

 

군사에서는 신부해(申不害)가 친히 한국(韩国)의 상장군으로 단임하였고

귀족의 친병을 국가의 군대에 편입시켜 엄하게 훈련시켰다..

 

중앙에 위치하여 전국 최대의 철광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도

핵심 과학 기술을 창조하여, 병기 제조에서 월등히 앞서고 있다.: "

"천하의 보검이 뭇사람인데, 소와 말은 육지에서 끊고,

물은 고니기러기를 잘랐다.(“天下之宝剑韩为众,陆断牛马,水截鹄雁”)",

"천하강궁노(天下强弩)는 모두 한나라에서 나가고,

멀리 있는 자는 굴 가슴을 괄폐하며,

가까이 있는 자는 살금살금한다(“天下强弓劲弩,皆自韩出,

远者括蔽洞胸,近者镝弇心”).".

. 개혁으로 부강해진 한국(韩国) "종신자신(終身子神),

국치병강(國治兵强)이며 한국(韩国) 침략자가 없다."

 

기원전 293년에 이르러 한국(韩国)은 많이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이궐 전투(伊阙之战)에 뛰어들어

진나라(秦国)에 대항할 수 있었다.

 

4. 좌우 양쪽에 수원이 맞닥뜨리면

바람에 따라 돛을 다는 것과 같다.

 

전에도 말했듯이, 한국(韩国)을 침략할려는 사람도 많지만,

전쟁이 날 때마다 한국의 동료들도 적지 않았으며

지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을 병탄했다고 해서

독식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전국(战国)전시기  군사개혁으로 강대해진

위국(魏国)은 한국(韩国)을 공격할때 조

진제(赵秦齐)가 적극적으로 달려와서 구조를 해줬고.. 

전국(战国)시기 후반부에 변볍(变法)후의 진조(秦赵)는

한국(韩国)을 공격할때

제위초(齐魏楚)도 바로 달려와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장 유명한 <위()를 에워싸고 조()를 구하다>는 이야기에서

방연(庞涓)이 두 번째 출병해 한국(韩国)을 공격한 것은

제나라의 간섭을 받아 귀군(歸軍) 과정에서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힘의 균형점으로 한국(韩国)은 오히려 숨 돌릴 공간을 얻었다.

 

5. 과정은 어떻든간에 끝까지 버텨서 이기면 된다.

 

전국(战国)시기 중반부에 중산국(中山国)도 한때는 강했고

한국(韩国)보다 못하지 않았지만

왜서 칠웅(七雄)에 못들어갔을가?

결국 진나라(秦国)가 아니라 조()나라에 의해 멸망된 것이다

 

칠웅<七雄>이란 단어를 가장 일찍이 제출한분은

동한반고(东汉班固)<한서(汉书)> 에서 응소(应劭)가 했던 말이고

바로 <칠웅(七雄), 진나라 및 6국을 말한다> 응소(应劭) 입장에서 보면,

진나라()와  멸망한 6개국이 그 역사의 주요 구성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국(战国)시대에 소소한 조연역할을 했던 국가도 있었고

여기에는 송(), 위(), 중산(中山)이 있었다..

그래서 가의(贾谊) <과진론(过秦论)>에서는

6개국을 더하여 이 세 나라를 합쳐서 9개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이들 국가는 한국(韩国)보다 영향이 적은 데다

진시황(秦始皇)과 천하를 통일하는 데도 별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하여 당나라시기 <사기색은(史记索隐)>에서는

"6국에는 한(), 위(), 조(), 연(), 초(), 제()가 있으며

진()과 합하여 7국이였으며 

또  6국과 함께 송(), 위(), 중산(中山)은 9국으로 

이 삼국은 너무 작고 또 일찍이 말망되었기때문에" 아예 무시해버렸다 

 

장평전(长平之战) 때  상당 지역(上党地区)을 내주고

다른 나라들이 갉아먹으니,

국토면적이 많이 줄어들어 3만평반키로밖에 안되었으며

진시항이 첫번째로 소멸한 국가이다.. 

하지만 실력에서 보면 이 순간을 잘 버티는 편이고

그 덕분에 칠웅(七雄)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니

한국에 대한 긍정인것이다

 

And

 

유대인이라고 하면 그들의 총명함과 월등한 장사군으로 인상적이다.

 

그 유태인들 중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 많으며..

그중 물리학가로 유명한 아인슈타인.. 그는

탁월한 공헌과 뛰어난 아이큐지수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코믹한 코미디언 채플린도 있으며

오늘날 부자 순위에서 시종일관 상위에 있는 저커버그도 있다.

 

유태인은 총명하고 강인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순탄하고 평온하게 안착되지 않았고..

여러 시기에 걸쳐 역사의 변천을 거쳐 분리 이동하였고..

더군다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1. 유대인의 기원

그들은 시아의 이스라엘 땅이나

히브리 땅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서기 1세기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 예루살렘이 로마인에게 점령당하자

유대인은 로마인에게 쫓겨 세계 각지로 유랑당했고,

조국 없는 유랑민족이 되자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불렀다.

 

2. 개봉(开封) 유대인 그룹의 형성

 

유대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많고,

그들은 독특한 집단으로 오랫동안 중국에서 생활했다.

그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할때는

일찍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당나라왕조(서기 8세기 전후)시기였고

일부 역사 유적과 물품의 산증 하에

최초의 유대인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건너왔다고 결론지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한다.

 

그때 당나라왕조 나라가 강하였고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문화의 개방과 포용으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의 상인들과 상호무역에 빈번하였으며 

대외로 많은 실크 및 도자기, 차() 등을 많이 수출하였고

그와 동시에 서역으로부터 보석, 향료,

화초 등 희귀한 보물들을 많이 수입하여

왕궁 귀족들이 차지 하였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송나라왕조까지 이어졌고

명나라왕조 초기에 와서 일련의 행동을 취하여

해외 상업의 판도를 더욱 크게 하였다.

 

이러한 대외 교류는 또한 상업적 두뇌로 유명한

유대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대륙의 번성과 광활한 지역과 풍부한 물산을 보았으며

심지에 대륙에 정착해서 정기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아졌다..

들은 서안, 낙양, 돈황, 개봉, 항주, 녕파, 북경,

천주, 양주, 녕하, 남경 등 지역에서 정기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천천히 개봉(开封)에 그들의 집단거주지역이 생겼고

송나라왕조시기 송미종(宋徽宗)황제는 명령하여 그들이 

중국에 귀속되는걸 허락하였으며 이로서

이들은 개봉(开封)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개봉()에 있는 유대인 그룹들 중국에 들어온지

너무 오래 되었고 인구도 엄청 많아졌으며 

또 상대적으로 진단거주지역이 형성되었고..

유대인 일부 습관과 문헌도 보존돼 있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3. 개봉(开封)유대인그룹이 생기게 된 원인

 

다년간 집단거주하면서 지금까지 생활해오는동안

개봉(开封)의 유대인들은 점차적으로 현지에 융합되었고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신속하게 뿌리 박고 싹이 텄으며 

이러한 주동적으로 현지 문화와 생활에 녹아드는 상황은

유태인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그들이 동화되는 구체적인 원인은 아마도 매우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지인과 통혼하고 과거시험에 참가하며

현지 성()으로 개칭하고 한문을 배우며 현지인복장을 입는 것.이며

현지 전통 풍속대로 생활해나가는것이 주요원인으로 된다..

하지만 그본적인 원인은 3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때 당시 나라에서 그들에 대하는 태도 및

그들이 현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하고

본토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수 있는데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왕조의 쇄국정책하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는

그들 자신의 전통에 대한 망각을 초래하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통 유교문화와

중국 전통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태인이 중국에 도착하자

역대 통치자들은 차별 없이 똑같이 취급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였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그들은 특히 유태인의 상술에 감흥하여, 그

들의 존재가 당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응시와 비즈니스에 동등한 정책도 줬다...

 

송나라 때 황제는 유대인 족장에게 조()씨 성을 붙여

시가로 상을 주었고

당시  조씨는 국성(國姓)였고..

이는 얼마나 외국인에 대한 우대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석(石)·김(金)·장(張) 등 17종의 성씨를  제공하여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유대인들이 이를 벤치마킹하여

한(漢)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반면 같은 시기 유럽 내 유대인 단체들은

경제·정치·문화 등 각 분야에서 차별을 받아

불평등한 상황에 처하였고

불평등 때문에 그들도 자연스레

그 지역의 주류 사회나 문화와

같은 방향으로 가기는 어렵다.

 

개봉(开封) 유대인들은  현지화와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 지역의  풍토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현지 생활에 융합되었다..

 

17세기후 청 왕조의 쇄국의 길은

아마도 그들을 동화시키는 가장 유리한 계기일 것이고 

외부의 차단으로 개봉(开封)의 유대인들은 고립되었고

이는 이들이 외부 유대 세계의 상황을 전혀 몰랐던 탓도 있다.

그들은 2백여 년 동안 민족의식과 종교전통이 날로 희박해졌고,

유대인들의 습속과 전통도 점차적으로 소실되게 도었다.. 

예를 들면 개봉(开封)의 마지막 유태인 랍비가 죽은 후에,

다시 새로운 랍비를 찾을 수 없고

개봉(开封)의 유대회당이 홍수로 무너진 후,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를 아는 유대인후배가 없었으며 

개봉(开封) 유대인들도 대외적으로 연락이 되지 않아

족내통혼의 전통을 버리고 현지인과 통혼하게 되고 말았다..

 

 

4.  이스라엘로부터 정통 유대인으로 거절당하다

 

2차대전후 유대인들은 힘든 시기를 끝냈고

대부분 유대인들 이스라엘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국가와 수도를 만들었다.. 

'개봉(开封)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후예들도

자기 민족끼리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거절당했다.

 

개봉(开封)유대인들은  현지인과 통혼으로 인해

자녀들의 신분이 부계(父系)일맥인 반면,

정통 유대인들은 모계(母系)일맥이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혈통과 문화에서

이미 엄청난 변화가 발생되었고 

순혈종 유대인이라고 해도

현지에서 몇백 년 동안 편안하고 평화롭게 살다 보면

완전히 현지화 되었다..

 

And

1. 잉정(嬴政)

진시황 잉정(嬴政), 9세에 6개국을 휩쓸며

시황제로 불렸고

그때 나이는 37세였다

중국 역사상 저명한 정치가, 전략가, 개혁가이고

첫번째로 화샤()를 통일한 강권정치인이다.

첫번째로 다미족의 중앙집권나라를 세웠고

일찍이 삼황의 "황", 오제의 "제"로 "황제"라는 칭호를 구성하였으며

처음으로 황제라 칭한 봉건왕조의 군주였다.

 

2. 유방(刘邦)

한태조(汉太祖)고황제(高皇帝)유방(刘邦), 패현풍읍(沛县丰邑)

중양리사람이고 서한왕조의 개국황제이다.

기원전202년 유방(刘邦)은   황제로 되었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하였으며 그해  54세였다.

한민족과 한문화의 유명한 개척자중 한사람이고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 탁월한 전략가 및 지휘가였다..

한족의 발전 및 중국 통일에 돌출한 공헌을 했다

 

3. 류수(刘秀)

한세조(汉世祖) 광무제(光武皇帝) 류수(刘秀) 는

자가 문숙(文叔)이고 남양군(南阳郡)채양현(蔡阳县)의 사람이며

동한(东汉)왕조의 개국황제이다..

역사상 유명한 정치가, 군사가이고

그의 나이는 31세밖에 안되었다..

그후루 12년의 노력을 들여 끝내 천하를 통일하였고

황제직위 33년 사이에 

유학과 절개를 크게 일으켰다。。동한(东汉)왕조

역시 후대 사가에 의해 중국 역사상 가장 풍화(风化)가 아름다웠고,

유학이 가장 성했던 시대로 추앙받고 있으며

 

4. 사마염(司马炎)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马炎)은 자가 안세(安世)이고

하내(河内)온현(温县)사람이며 

진나라(晋朝)왕조를 세운 황제이다..

함희(咸熙)2년 아버지한테서 작진왕(爵晋王) 직위를 물려받고

몇달후 위원제(魏元帝) 조항(曹奂)을 강박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왕위자리를 차지 하였으며

국호를 진()으로 고쳤고 낙양(洛阳)을 수도로 정하였다..

황제되던해 그의 나이는 29세이고 

나라를 세운후 그는 일련의 경제 조치는 생산을 발전시키고

아울러 호조식(户调式)을 반포하였으며

태강년해(太康年间)는 서진(西晋)에서 강성한 나라가 형성되었고

역사상에 <태캉자치(太康之治)>라고 하였다..

 

5. 사마예(司马睿)

 

진원제(晋元帝) 사마예(司马睿) 자는 경문(景文)이고

동진(东晋)의 개국황제였다..

서기 276년 낙양(洛阳)에서 태여났고

후에 왕도(王导)의 건의로 건강(建康)으로 가서,

강동(江东)지역의  대족(大族)을 사귀었다.

사마예(司马睿)는 진나라()왕조의 귀족과 강동(江东) 대족(大族)들의 지지하여 

서기 317년에 

진왕(晋王)으로 되었으며 서기 318년에 황제로 되었고

이해 나이는 42세였다

6. 탁발규(拓跋珪)

북위(北魏)왕조의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는

자가 섭규(涉珪)이고 선비족(鲜卑族)이며 

북위(北魏)왕조의 개국황제이다..

서기 386년 탁발규(拓跋珪)는 혼란한 틈을 타서

나라를 부흥시키고, 대왕으로 즉위하였고

그해 4월에 국호를 <위()>로 정했으며

바로 북위(北魏)왕조였다..

북위(北魏)왕조 시황제3년(398년), 탁발규(拓跋珪)는

수도를 성낙(盛乐)으로부터 평성(平城)으로 옮겼으며 

정식으로 황제라고 칭하였고 그해 나이는 16살이였다..

6. 류유(刘裕)

 

송조제(宋祖帝)류유(刘裕), 자는 덕여(德舆)이고 

아명은 기노(寄奴)이다..

진릉군(晋陵郡) 단도현(丹徒县) 경구리(京口里),

서한(西汉) 초원왕(楚元王) 유교(刘交) 이후 태어났다.

동진(东晋)왕조시기부터 남북조(南北朝)왕조 시기까지

걸출한 정치가(政治家), 개혁가(改革家), 군사가(军事家) 라고 하며

남조(南朝)왕조의 개국황제 였고 남조(南朝)를 통일한해 나이가 57세였다.. 

그는 강남 경제의 발전, 한문화의 보호와 발양에 중대한 공헌이 하였으며 

아울러 강좌6 조(江左六朝) 영역에서 가장 광대한 시기를 열었고

<원가자치(元嘉之治)>을 위하여 단단한 기초를 닦아놓아

<남조(南朝)제일 황제>라고 불렸다..

 

7. 양견(杨坚)

수문제(隋文帝)양견(杨坚), 수나라(隋朝)왕조를 세운 황제이고..

그는 한족이고 홍농군(弘农郡) 화음(华阴)사람이며

한태위(汉太尉)양진(杨震)의 14세 손자였다.

양견(杨坚)은 군사에서 수백년동안 심하게 찢어진

국을 성공적으로 통일하였기때문에

후세사람들은 <성인커한(圣人可汗)>이라고 존경하였다. 

정치면에서 그는 선진적인 관리를 선택할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문화경제를 발전하여 그때 당시 중국으로 하여금 흥성한 나라(盛世之国)로 되었다

양견(杨坚)이 황제 되던해 나이가 40세였고 항창 열정과 패기가 넘칠때이다..

8. 이원(李渊)

당고조(唐高祖)이원(李渊)은 자가 숙덕(叔德)이고

용시성계(陇西成纪)사람이며 

당나라왕조의 개국황제이다.. 

수나라 말기 천하가 혼란속에 빠질무렵

이원(李渊)은 여세에 몰아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长安)은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원(李渊)는 수공제(隋恭帝)를 강박하여

자리를 넘겨 받은후 바로 장안에서 황제로 되었으며 

국호를 당()으로 바꾸고  수도를 장안(长安)으로 정했다..

당고조()이원(李渊)는 황제 되던해 나이는 52세였다.. 

 

9. 조광윤(赵匡胤)

 

조광윤(赵匡胤) 후당(后唐) 명종천성년(明宗天成年)에

낙양(洛阳) 쟈마영(夹马营)에서 태여났고 

북송(北宋) 개국 황제였다.. 조광윤(赵匡胤)은

<진교군란(陈桥兵变)>을 일으며 황제자리를 뺐었고 

후주(后周) 공제(恭帝) 차종훈(柴宗训)이 자리를 내줬고 

조광윤(赵匡胤)이 황제 되면서 원건륭(元建隆)으로 바꾸고

국호를 <송()>으로 하였으며

그해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역사적으로는   <송조(宋朝)> 혹은

<북송(北宋)>이라고 하였다

10. 조구(赵构)

송고종(宋高宗)조구(赵构)는 자가 덕기(德基)이고

직위기간은 35년정도 되며

남송(南宋)왕조의 개국황제이고 

황제되던해 나이는 20살이였다..

조구(赵构)는 순희(淳熙)14년(1187년) 에 죽었고..

중국역사상 많지 않은 장수의 황제중 한명이라고 한다

조구(赵构)는 서예에 능하며  필치가 소탈하고 우아하며,

자연스럽고 유려하여, 진인(晋人)의 정취를 자아낸다.

그의 작품<한묵지(翰墨志)>가 있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작품 <초서낙신부(草书洛神赋)>등이 있다

 

11. 쿠빌라이(忽必烈)

쿠빌라이(忽必烈)는 몽고족이고

정치가 및 군사가이다.. 

대몽고 마지막 칸(可汗) 도 쿠빌라이(忽必烈) 와 꼭 같이

원나라()왕조의 개국황제이다..

1271년에 <대몽고>로 하였고 국호를 <원()>이라고 하였으며

그해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1272년에 수도를 원대두(元大都)로 옮겨왔으며

이어 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1279년에 남송(南宋)을 멸하였다

 

 

12. 주원장(朱元璋)

주원장(朱元璋)은 호주(濠州)종리(钟离)사람이고

원나라()왕조 말기 농민봉기의 수령이였다.. 

명나라(明朝)왕조를 세운 개국황제로 명태조(明太祖)라고 하며

탁월한 군사가(军事家), 전략가(战略家), 통솔(统帅) 능력자 이다..,

주원장(朱元璋)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고

25세 되던해에 곽자흥(郭子兴)이 이끈 홍건군(红巾军)에 참여하여

원나라()왕조와 반항하였고

나중에 1368년 각 분야의 농민 봉기군을 격파한후 

응천부(应天府)에서 황제로 되었으며 그해 나이는 40세였다..

 

13. 누루하치(努尔哈赤)

청태조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 ,

누루하치(努尔哈赤)는 청나라 왕조의 창시자이고

그는 만주족언어와 한문에 통달하였다.. 

25살 되된해 군사를 일으켜 여진족의 각 부락을 

광동부(关东部)에서 평정하였고

명신종(明神宗)만력(万历)44년 되던해 후금(后金)왕조를 건릭하여

료동(辽东) 지역을 할거 하였다..

사르후(萨尔浒) 전투 후 수도를 심양으로 옮겼고 

이후 요동(遼東)을 석권하여, 명나라를 함락시키고 요칠십여 성을 함락시켰다.

누르하치 후금(后金)을 건립한하고 집권한해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And

학교시절에  교과서에는 많이 안나왔지만  

곽거병(霍去病) 은 엄청 멋있는 남자일거라고 상상했었다.. 

표기(骠骑)장군은 사람이 말수가 적고 누설하지 않으며, 

과감히 임할수 있는 기세가 있다.. 

천자가 손오병법(孙吴兵法)을 가르칠려는

욕망을 체험해볼려고  대언하였으며:

<고방략여이,부즈학고병법,顾方略何如耳,不至学古兵法

.(고대의 병법을 배우지 못해, 어찌 된 영문인가.)>.

천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장군과 마주하여 대언을 하였다

"흉노를 멸하지 않으면 집이 없는 법이다"

이로서 장군을 엄청 아끼는걸 느낄수 있다..

그러나 값이 너무 비싸면 일을 할 수 없고,

군대에 가서 천자를 태관을 보내어 여비를 수십 곱하고,

기왕이면 무거운 차를 버리면 량육을 버리고,

사사에는 굶주린 자가 있다:

싸이와이(塞外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 있으면

병사들은 식량이 결핍하였지만 자진불능하지만

장군은 광활한 구역을 가로지르고 다녔으며  (骠骑尚穿域踢鞠)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장군은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희사가 물러나며(喜士退让),인자함이 눈가사이에 묻어나고

두 사람의 지조가 이러하였다..

 

곽거병(霍去病), 중국역사상 가

장 젊은 군신(战神)이라는걸 많이 알려졌지만

곽거병(霍去病)이 남들의 차별대우를 받는 사생아로부터 

어떻게 한시대의 군신(战神)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는분이 많을것 같다.

그가 얼마나 강대했을가? 

오늘 우리 다함께 강성했던 한무제(汉武帝)시대로 돌아가

한시대의 군신(战神)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웅이 특별히 많았던

두 한조(汉朝)시대의 장군들속에

그 시기 젊은이들의 우상인 항흉노(抗匈) 젊은 영웅--곽거병(霍去病)

그러나 역시나 구유에 가득 찬 장군이었고 

특히 역대 역사책의 토를 끊지 못한 것은

바로 곽거병(霍去病)의 논란거리였던 사덕(私德)이었다.

중국 역대의 명장들은,

대부분 병졸을 동고동락시켜 기본 인품으로 삼았지만

하필이면 곽거병()은 특수를 누렸다고 한다

<한서(汉书)>, <사기(史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매번 출정할 때마다

전용 요리사와 음식들을 지니고 다니지만

병사들은  굶주려 비틀거리기까지 하였고 

그의 전용 음식은

아직 다 먹을 수 없을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행군도중 병사들과 말은 피곤하여

걷기도 힘든 상태이지만

곽거병(霍去病)은 흥이 엄청 많았고 

늘 사병들에게 축구장을 열어

그를 데리고 축구를 하면서 즐기였으며

한판 축구를 하고나면 대부분 사람들이

늘어지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

동시대 사학자 사마천(司马迁)의 말을 빌면,

귀불성사(贵不省事-귀하지만 철들지 않았다)한다.

역대왕조의 문인들도 이러한 각종 발길질로

곽거병(霍去病)의 중재지장(中材之将) 및

병사들을 아까지 않은 결함을 호되게 꾸짓었다..

마치 이 젊은 장군은 재능은 별로이고

우선 향락만 추구하고

심폐가 없는 부잣집 도련님인걸로 생각되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재능이 별로 없어보이고

몰상식한 캐릭터르 가진 곽거병(霍去病)은

18살 되던해부터 흉노와의 전쟁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바로 교착된 흉노의 전장에서 폭발과 폭풍이 한바탕 불었고  

앞뒤로 여섯번 출전하면서

4번은 주장(主将)을 맡으면서

누계한 적군 11만여명을 참살하였다..

초원을 휘잡고 다니면서 흉노를 호되게 족쳤고

봉랑거서(封狼居胥) 영광의 순간을 거뒀으며

나아가 이후 2000년 동안 중국 군인들의

지고한 구애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덕(私德)을 토로한 《한서(汉书)》

역시 깊은 감정의 필치로

그 뜨거운 열혈 풍모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고

 장군 비오의 용솟음치는 물결은,

6개의 전기로 벼락을 격파하였다고 기록하였고..

이러한 멋을 뿜는 곽거병(霍去病)의 사덕(私德)을 꾸짖던

질의자(质疑者)들은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도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라는 말로 ,

곽거병(霍去病)이 이렇게 멋지게 싸운 것은

모두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해석에 나섰다고 한다..

이런 휘황찬란한 성적은 진짜로 운명이 좋아서 나왔을가?

당연히 그렇지 않고.. 

곽거병(霍去病)의 사적은 바로 진정한 전설이라고 생각한다.

한무제(汉武帝)건원원년(建元元年)시기

곽거병(霍去病)은 평양공주집(平阳公主府)에서 태여났고 

집안의 여자하인--

웨이소얼(卫少儿)과 평양현 소사-곽종루(霍仲孺) 사이에서

태여난 사생아이다..

이와 같은 출신은 마치 <곽거병(霍去病)>의 운명은

본래 평범할 것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 같으며

그도 본래는 조용한 일생을 보낼수 있는 운명으로 보였다.. 

하지만 인생의 바꿈이 바로 다가왔고..

그의 이모인 위자부(卫子夫)가

한무제(汉武帝)에 의해 궁중에 들어가

황후로 봉해짐에 따라 

곽거병(霍去病)은 하인의 아들에서

갑자기 황실의 친척으로 되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외삼촌도

이때부터 한제국(汉帝国)의 떠오르는

군사 장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풍족한 환경에서 살면,

마땅히 호화로운 부귀생활을 누려야 하는건데..

그러나 곽거병(霍去病 어릴 적부터 칼춤과 창춤을 좋아했고,

군사적인 기마술을 좋아했고

매일 외삼촌인 위청(卫青)을 따라 영내에 있으면서 

오랜 시간을 거쳐 눈과 귀에 익숙하게 된거는 

병마와 말의 풍운전사와 제국 방략에 관한것뿐이다..

빠른시간으로 곽거병(霍去病)은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경험으로 군대에서 굴러다니면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유능한 소년장사로 성장했다

 

기원전 123년 미양궁(未央宫)이 거대한 전당에 있을 때,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거물급 패자 된 스승,

한무제(汉武帝)가 탄생하였다.

그날 한무제(汉武帝)는 모든 일과 오락을 뒤로 하고

궁에서 병법(兵法)을 논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학생은 오직 한사람이였고

이사람은 바로 한무제(汉武帝)의 외조카이고

웨이쏘얼(卫少儿)의 아들인 곽거병(霍去病)이였다.. 

정상대로라면 황제가 친히 「손자병법」을

해설하는 것은 크나큰 은전일것인데

젊은 곽거병(霍去病)은 

도리어 따분하고 흥미가 없는 모습을 본

한무제(汉武帝)는 버럭 화를 냈다..

한무제(汉武帝)의 진노에 대해,

곽거병(霍去病)은 전혀 두려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전쟁은 임기응변만 하면 된다고 하니,

전혀 옛 병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황제한테 얘기한다..

유아독존적인 한무제(汉武帝) 앞에서,

아직 감히 그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한무제(汉武帝)는 전혀 화내지도 않고

곽거병(霍去病))을 징벌하거나 멀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곽거병(霍去病)한테

표기교위(骠骑校尉)라는 엄청 큰 직위를 줬다.

동시로 그로하여금 삼촌을 따라

흉노와의 전장에 동행하라고 하였다.. 

곽거병(霍去病) 본인 인생에서

처음으로 참전한 흉노와에 전장에서 

흉노를 호되게 족쳤다..

사막남부전선에 도착하여

17세도 안된 곽거병(霍去病)은

적극적으로 종군을 요청하여..

800명 기병(骑兵)을 거느리고

대오에서 벗어나

바로 흉노의 후방에 쳐들어갔다..

흉노에 대한 작전은 웅재대략의

<한무제(汉武帝)> 일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기원전123년 곽거병(霍去病)은

표요교위(骠姚校尉)의 군적의 직위를 받고 

삼촌 위청(卫青)을 따라 사막남쪽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800명의 정예기병을 인솔하여 

고군분투하여 흉노 적군 오지 수백 리를 깊이 침투하여

적군을 2000명을 죽였고

흉노찬위(匈奴单于-흉노족 군주에 대한 칭호.)의 숙부를 포로한걸로

첫 전장에서 성과를 거뒀으며 이 전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풋내기 병인 곽거병(霍去病)은 경기병 기습 전술은

마침 모험을 좋아하는 한무제(汉武帝)의 마음에 꼭 들어했다

한무제(汉武帝)의 용인술은 줄곧 매우 대담했고

그는 곽거병(霍去病)의 몸에서 남보다 뛰어난 담력과 식견을 보았다.

그래서 한무제는 그에게 중책을 맡기고

하서(河西)쪽을 평정하도록 했다.

 

하서(河西)는 바로 하서주랑(河西走廊) 이고

이곳 긴긴 협곡도로는 중원(中原)과 서역(西域)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하서(河西)만 공략하면 흉노를 차단할 수 있고

역 지역에 대한 직접적 한나라의 영향력 펼칠수 있을뿐만 아니라

하서(河西)를 공략하면 흉노의 오른쪽팔을

짤라놓은것 같은 효과를 보게 된다

 

하서전(河西之战)은 곽거병(霍去病)이

처음으로 혼자서 대군을 이끌고 전투를 치른 것이고

그때 그의 나이는 19살밖에 안되었으며

이는 지금의 대학1학년정도밖에 안되었다..

하지만 하서전(河西之战)은

흉노전쟁과의 승리와 패전을 가르는 중요한 관건이다.. 

다른 사람이였으면 일찍이 이런 강대한 압력에 눌려버렸고..

무서워서 손발이 떨릴정도였다고 한다..

하물며 곽거병(霍去病)도 그냥 일반사람이 아니였는가?

이전에 흉노를 대적했던 전쟁 중 한군은

주로 안정적이고 침착한 전술을 사용했었고..

바로 흉노의 오지에 들어가서도

조심스럽게 한걸음한걸음  진을 쳤으며

다만 흉노에게 습격당할가봐 많이 두려워했었다..

결전에서 한군(汉军)은 보통 전차로 자신을 포위하면서

이것을 진지로 삼아 활로 상대의 역량을 소모하였다

흉노의 공세가 일단 저지당하면,

전차 진에 숨어 있던 기병이 총출동하게 되고

최종 상대방을 쳐부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전술이 효과가 있었는데 해가 갈수록 흉노는 한군(汉军)의 이런 전술이 익숙해졌다。한군(汉军)이 사막에 들어오기만 하면 흉노는 멀리 숨어버려 예봉을 피한다(避其锋芒)..흉노들은 한군(汉军)이 흉노를 공격할수 있어도 자기네 국토를 점령하지는 못한다고 알고 있다.. 흉노를 항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흉노인을 죽이는 것이고다시 말해서 일단 작전에서 흉노인을 찾지 못하면, 한군(汉军)은 실패하게 된다.흉노를 토벌하는 것은 병참의 압력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설사 패전이 없더라도 본전을 밑지는 것이고여러 번 공을 들이지 않고 돌아오면 한나라가 무너진다..바로 흉노의 이러한 전술때문에 기원전 123년 한나라 군대는 전과가 매우 적었고.. 심지어 장군 위청(卫青)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곽거병(霍去病) 이를 바꿨고곽거병(霍去病)이 흉노에 대한 새로운 전술적 전격전을 고안했기 때문이다.

기원전121년 곽거병(霍去病)은

4만명의 기병(骑兵)을 거느리고 하서(河西)쪽으로 쳐들어갔고 

짧은 6일 시간으로 5 왕국을 거쳐 천여 리를 종회무진하여,

적수 8960급을 획득하였다.

줄곧 기동성은 흉노인이 천하를 종횡무진하는 열쇠였는데

그러나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것이

곽거병(霍去病)의 지도 아래,

한군(汉军)은 뜻밖에도 자신보다 더 빠르고 더 매섭게 변했고

동시에 흉노들은 머리를 쥐여짜도

곽거병(霍去病)이 어떻게 자기네를 찾아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곽거병(霍去病)은

흉노인들에게 결코 경험을 총결집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짧은 몇달후에 곽거병(霍去病)은

두번째 하서전(河西之战)을 발동하였고..

늘 그렇듯이, 곽거병(霍去病)은 육중한 군수부대를 따돌린후

다시 천리를 달려 엘리트 한나라 기병들은 

천리를 우회하여 철벽으로 접합하였다..

그러면서 흉노를 때려 기절초풍하고

뿔뿔이 흩어져 대승을 거두었다..

 

하서전(河西之战)이후로

하서(河西)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부락(部落)들은 투항하였고 

하서주랑(河西走廊)은 한무제(汉武帝)에 의하여

사군(四郡)으로 구분함으로

흉노의 세력은 양분되고 말았다

 

한번고생으로 영원히 흉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무제(汉武帝)는 규모가 방대한

막북대전(漠北之战)을 일으켰다

곽거병(霍去病)과 위청(卫青)은 기병(骑兵) 5만명을 거느리고

목표는 흉노찬위(单于흉노의 군주) 주력을 향하였고 

이번 전쟁에서 곽거병(霍去病)은

흉노찬위(单于흉노의 군주)를 잡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엘리트 강군도 대부분 그의 손에 집중되었고

곽거병(霍去病)은 가벼운 수레와 익숙한 도로처럼

군수 자동차를 운전하였다..

심지어 한무제(汉武帝)가 직접 하사한 음식도 버리고

바로 뒤이어 그는 우북평에서 출발하여,

천리를 급습하여, 끝내 흉노인을 찾아냈다..

아쉽게도 곽거병(霍去病)이 찾아낸건

찬위(单于흉노의 군주)가 아니고 우현왕(右贤王)이였고..

우현왕(右贤王)은 거의 모든 것을 면제받았는데,

정보 실수가 아니었다면.

찬위(单于흉노의 군주)가 곽거병을 만났을경우

전체 흉노가 멸명될수도 있었다..

 

세월이 변천하여, 우리는 역사 서기를 뒤적여 보면서

그 웅장한 전쟁 장면을 보는것 같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솟아오르는 전쟁의 연기.

그 시체가 온 들판에 널린 처참한 초원의 모습,,

역사의 풍운이 요동치고

그는 모두 전공이 혁혁한 세대의 명장이고

흉노를 반격한 영웅이였다

 

And

진시황이 6개국을 멸하고

화샤(华夏)를 통일한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다.. 

하지만 통일한 진나라왕조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진시황이 죽고난후

2세에와서 몇년안지나   

진(秦)제국은 다시 살아나는 6개국의 힘에 의해 무너졌다.

 

여기서 <6국>은 완전에 소멸되지 않았음을 뻔하게 느껴지고

6국(제초연한조위 齐楚燕韩赵魏)의 분단 역량과 생명력이 매우 강인하여,

실제로는 화샤(华夏) 통일 프로세스의 대항자이자 전복자가 되었다.

즉, 6개국의 복벽력을 근원적으로 소멸시켜야만

화샤(华夏) 의 진정한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는 판도 형식뿐 아니라 고대 국민의 국족적 공감대도 포함한다.

>>진새황의 통일은 한때 파괴를 받았다..

 

전국(战国)후기 시작하여 진시황의 전국통일과정이 전개되면서 

먼저 멸망된 6국은 이미 복벽(复辟)의 힘이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복벽 역량(复辟力量)은,

남아 있는 6국의  왕족·귀족·장령뿐 아니라,

원래 6국 통치하의 일반 백성들도 포함하였다.

이런 복벽의 힘复辟力量)은 무력에 있지 않고,

6개국 유민의 국가 정체성이다.

 

제() 나라왕조 같은 경우 역사상에서

일찍이 연나라(燕国), 진나라(秦国) 및

항우(项羽)에 의하여 정복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제나라(齐国)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는 훗날 제나라(齐国) 다시 일어날수 있는

가장 관건적인 기초로 된다고 생각한다..

<田横五百壮士탠앤헝 500용사>라는

스토리에서 슬프고 아름다웠지만

제나라(齐国) 사람들의 완강한 추구는

제나라(齐国)를 다시 일쿼세우고 

그 나라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 6국의 복벽의 힘(复辟力量) 은 언제쯤 깔끔하게 소멸되었고

고대 중국 진정으로 화샤(华夏)통일은 언제로 인정될수 있을가?

 

진시황은 당연히 완성못했다고 생각하고

서초(西楚)패왕(霸王), 항우(项羽)는 더한 역륙주였다

그럼 한고조유방(汉高祖刘邦)은 했냈다고 할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면

유방(刘邦)은 3분의2를 완성하였다고 생각된다

 

진나라왕조가 멸망시기

항우(项羽)는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대분봉(大分封)"을 진행하면서

다시 전국(战国)시기의 6국이 회복되었고

심지어 더 많아졌다..

여기에 한왕(汉王), 하남왕(河南王), 웅왕(雍王),

싸이왕(塞王), 구강왕(九江王), 은왕(殷王) 등등

12개 왕국을 더 추가하였다..

항우(项羽)의 분봉(分封)은 6국이 다시 회복될수 있는

희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켰고

반면 화샤(华夏) 정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6국의 복벽력(复辟力量)은 <일가일성(一家一姓)>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항우(项羽)도 약간의 긍정적인 작용을 하며

그것이 바로 6개국의 왕족들이

왕위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타파하여

여러명의 밑바닥 출신 장수들도 역시 왕이 되었고

이로서 진승오광(陈胜吴广)의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王侯将相宁有种乎)>의

정신을 관철시켰다..

 

유방(刘邦)이 항우(项羽)를 소멸시켰을 때,

또 연이어 다수의 이성왕(异姓王)을 제거하였고

여기 이성왕(异姓王)에는 제나라(齐国)뿐만 아니라

조나라(赵国), 한나라(韩国) 등 옛왕족들이 있으며

그외 한신(韩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천희(陈豨) 등 한나라 장군들도 있었다.. 

항우(项羽)와 유방(刘邦)의 이러한 거동은

6개 국의 대물림을 상당 부분 혼란시켰고

6개국의 복벽 역량(复辟力量)에 대한

구유정체성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6 개국의 복위 역량에 있어서,

왕위의 법통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제후국 하나를 복위하자는 호소의 핵심이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당연히 6개국

구 제후왕의 직계 후손이고

그담은 6국왕족의 방계 후손이다..

가령 초나라(楚国)가 복위할 때의 초회왕(楚怀王) 라든가

한나라(韩国)가 복위 당시 한왕성(韩王成)과

한왕신(韩王信), 조나라(赵国) 복위 당시의 조왕헐(赵王歇),

위나라(魏国) 복위 당시의 위왕책(魏王咎)과 위왕포(魏王豹) 은

모두 구초왕(旧楚王), 구한왕(旧韩王),

구조왕(旧赵王), 구위왕(旧魏王)의 직계후손이며

기본은 모두 공자 신분이다

한편, 제나라(齐国)가 복위할 때의

전담(田儋)·전영(田荣)·전횡(田横)은

구제왕의 방계(方系)인 친척일 뿐이다.

 

하지만 6개국의 왕족과 법통이 깨진 후

6개국의 복원의 힘은 이러한 구왕족한테

의탁하기는 엄청 어려운 일이 되었고

한발 물러나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할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과거에 제나라왕과 초나라왕으로 했었던

한신(韩信), 또 연나라(燕王)왕

천희(陈豨), 량나라(梁王)왕 팽월(彭越), 

조나라(赵王)왕 장얼(张耳) 등 분들이

바로 초한(楚汉)의 봉왕(封王)에 의거했던 것이다..

 

한신(韩信)이 여러 차례 반한(反漢)의 자립을 부추긴 것은

구 6개국 복위의 힘이 형식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한조(汉朝)의 대다수 이성왕(异姓王)이 숙청된후 

각지역의 제후왕들은 모두 유씨(刘氏)의 자손으로 변해버렸으므로

6개국의 복원의 힘이 이로서 소실된거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정반대로 이런 낡은 '6개국 인정'이

다시 이들 유씨 자손들에게 기탁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경제(汉景帝) 시대의

'칠국지란(七國之亂)'으로,

진(秦)말의 분열 양상을 거의 재현했다.

 

여기서 보다싶이 6개국 복원희 힘은

<일가일성(一家一姓)>의

충성을 개의치 않다는걸 볼수 있고

어떤 지방의 횡포 이익에 부합된다면,

제후는 성은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제나라(齐国)의 군주가 변천한 것을 보고,

이 점을 깊이 깨닫게 되고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제나라(齐国)왕 국주의 성시는 강()씨였고..

전국(战国)시기에 와서는 전()씨로 바꿨으며

초한(楚汉)의 패권 다툼 때 일찍이 한신(韩信)이 충당하여

서한(西汉)시기에 와서는 류()씨성으로 바꿨다

비록 로열 패밀리일지라도

제나라()왕계의 몇 명의 제후(诸侯)<제남왕류피광(济南王刘辟光),

쯔촨 왕류현(淄川王刘贤), 죠오시왕류앙(胶西王刘卬),

죠오둥왕 류웅구(胶东王刘雄渠)>.

들은 여전히 <칠국의란(七国之乱)>에 참여했던

중요요원들이였다..

>> 구유분봉 체계를 종결한 것은, 한 무제(汉武帝)의 추은령이었다.

 

6개국 복원 역량에 대해 철저히 '부저추신(釜底抽薪)'하지 않으면,

일부 지방 세력의 분열 경향을 없앨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나라왕조(汉朝) 역시 화샤(华夏)의

진정한 통일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할수 있고

특히 민족 의식의 통일이다..

 

사실상 결국 낡은 할지(割地) 분봉(分封) 사상을 타파하고,

화샤(华夏) 민족 의식의 대일통을 완성하였으며

이 임무는 한무제(汉武帝)가 진짜로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한무제(汉武帝)의 방법은 바로 <추은령(推恩令)>이였다..

 

"추은령(推恩令)"은 겉으로는

각지역 제후(诸侯)의 왕권을 불할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제후국(诸侯国)을 점차적으로 산산히 쪼각쪼각 냈으며

그들의 다수 군사 정권 권력을 완전히 박탈하였고 

경제권만 남겨줬다.. 

한무제(汉武帝)이후로 지방제후(诸侯)는 더 나아가서

그냥 아무 권리가 없는 허직으로 변화시켰고..

이제 더는 지방 령주(领主)들이 아니다..

이번 행동은 각지의 백성들이

제후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타파하였고

일반인들이 제후에게 충성할 수 있는

법리적 토대도 잃어버렸으며

'조정과 황제에 충성하고'를

일반 백성들의 최종 선택지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6개국의 복벽 역량은 마침내 물 되어 버렸고

더 이상 이런 '총중고골(冢中枯)'을 그리워할 사람은 없게 되었다

어떤 지방의 부호들은 이러한 중앙의 관리에 불만은 있었지만

더는 <복국의구호>를 내세울수 없게 되었으며

봉기된 명분도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샤(华夏)의 통일은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진시황의 6국의 소멸은 그냥  그중 하나의 중요한 단계였으며 전부가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And

지금 저희 공식휴식가 일년에 토탈 11일 ,,

만약에 주말까지 합치면 일년 공식휴가일은 대략 115일이며

그기다 년휴가, 가족방문등 휴가등을 합치면

일년중 휴가시간이 360일에서 3분의1을 차지하게 되네요.

하지만 회사마다 휴가 규정일이 다르기때문에 휴가날자가 조금씩 다를수도 있습니다.

그럼 몇백년전 , 심지어 천여년전 고대왕조시기에도 공식휴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진나라, 한나라왕조시기

공식휴가일을 <고귀(告归)>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나라왕조 시기 장례휴가 규정을

36일에서 3년시간으로 다양했다고 합니다. 

동시에 한나라시기 5일 근무을 제도를 설릭하였고

이는 바로 <관리는 5일 휴일하고 하루는 휴식하는겁니다.>

이런 순환휴가도 있을뿐만아니라 명절에도 휴가를 보냅니다.

동지(冬至)시즌과 하지(夏至)시즌 전후에 휴일이고 

이날에는 "몸이 안정을 취해야 하고 ,

백관절사(百官绝事)하며, 정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밖에 만약 관원이 공로가 있다면,

국가는 법에 따라 휴가를 허가를 해주고

병이 났을때도 휴가를 주는데

이건 특별히 하사해주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병휴가(病假)는 길어서 3개월을 초과하면 안되고.

초과될경우 면직될수 있습니다. 

 

당나라왕조시기에 와서는 10일 근무일 제도로 규정되어 

당 고종 영휘(唐高宗永徽)는 3년시기 휴가에 대한 규정으로 

'순회휴가를 진행하며 , 휴가시 업무를 보지 않으며 ,

백료와 함께 목욕을 한다'로 

10일마다 하루씩 쉴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대왕조시기(魏晋南北朝

병가(病假)과 장례휴가에 관하여 보충규정을 추가하였고

병가(病假)는 많아도 100일을 넘기면 안되고 

장례휴가는 길어서 3년을 넘기면 안된다고 했답니다.

 

삼국시기에 와서는 교대 휴무 제도가 생겨났고

이를 <번가(番假)>라고 불렀으며 

이는 바로 직원들은 돌아가며 휴가를 보낼 수 있는겁니다.

이 제도의 합리성이 뚜렷하여

그후 각 왕조에서  이 휴가법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수당(隋唐)왕조시기 근로자들은 "순일(旬假) 휴가"를 제외하고,

법정 공휴일은 일반적으로 모두 명절 휴가이며,

설기간, 동지기간 등의 휴가는 7일에 달하였습니다.

그외 만약에 부모가 3000리밖에서 살고 있으면 

매3년에 30일간의 가족방문휴가를 받을수 있고

부모가 500리밖에서 살고 있으면 

매5년에 15일간의 휴가를 받을수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식이 있을경우면 9일간의 휴가를 받을수 있고 

다른 친척들의 결혼식이 있을경우면 1-5일간의 휴가를 받을수 있습니다. 

장례휴가는 사망자와 관계가 원근에 따라 정해졌고

병가(病假)는 일반적으로 100일을 넘으면 안되고

그렇지 않으면 면직될수 있습니다. 

 

특별이 얘기하고 싶은건 

당나라왕조시기에는 낭만적인 시인들 많아서일가..

아니면

당나라사람들 낭만을 좋아해서인지 

여행 휴가(旅游假)와 의상 휴가(授衣假)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행 휴가"는 일종의 관광 휴가이므로,

휴가 기간은 각지의 기후·풍토에 따라 융통성 있게 규정하였으며,

통일된 규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상 휴가(授衣假)는

겨울복장을 준비하라고 주는 휴가일이라고 합니다.

 

당문종태하8년(唐文宗太和),어사대(御史台)에서 

서로 다른 직급의 관원이

매월 사유 휴가를 신청할수 있는 인원수와

매번 휴가를 신청한 날수를 규정하였으며

만약에 신청한 휴가날수를 초과할경우면

한달 월급으로 벌칙금을 지불하게 됩니다. 

 

또한 중요한 인물의 생신을 만나도 휴가를 얻을수 있으며

여기엔 황제탄생일 휴가 3일, 노자(老子)

혹은 불조(佛祖)탄생일 하루 휴가 받을수 있습니다. 

송나라왕조시기에 와서는

중국 역사상에서 전통명절이 가장 많았던 왕조였으며

<천기절(天棋节)>이라고 하는

새로운 명절도 만들어냈을뿐만아니라 

명절때면 꼭 휴가를 주군하였습니다. 

 

송나라왕조 초기에는 휴일은 36일로,

다른 수많은 이름으로 된 휴가까지 포함하면,

관리들은 일 년에 100여 일 휴가를 낼 수 있습니다.

 

남송왕조시기 전쟁이 많았지만

관리들은 매달 10일간의 휴가를 받을수 있고

일년중 적어도 120일의 휴가날자를 받을수 있습니다.

그밖에 송나라왕조시기에는

군부대, 학교 휴가에 관하여 자세한 규정을 만들었고

심지어 하위층의 병역에

대해서도 순차휴가를 내도록 했다고 합니다.

 

홀필열(忽必烈)은 원나라 왕조를 세운 후,

당나라와 송나라왕조 시기의

"십일일휴목-10일일하고 하루 휴식"이라는

순차 제도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절휴가 날자를 많이 줄였고

일년중 공식휴가일은 52일로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명나라왕조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여나 힘들게 자랐기때문에 

공무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명나라왕조를 건립한후 많은 공식휴가일을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주원장(朱元璋)은 공직작들한테 일년에 휴가를 3일만 주었는데

이는 설, 동지와 주원장(朱元璋) 본인 생일날자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명나라왕조 최초시기는 가장 목숨을 걸며 일할저도록 가빴고.. 

많은 일벌레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정말 너무 한것 같아서

또 겨울 방학을 증설하여,

12월부터 한 달간 겨울 방학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후

명나라왕조 휴가가 점차적으로 많아졌고

3일휴가를 더 추가하였으며

여기에 원단(元旦), 보름(元宵), 중원(中元), 동지(冬至) 등 명절까지 합쳐

18일기간 휴가를 받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왕조시기는

명나라 휴가 제도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다고 합니다. 

 

And

측천무(武则天) 중국역사상에 유일한 여자황제였고..

또한 훌륭한 정치능력자이다..

그는 관용귀족(关陇贵族)의 황실 권리에 대한 위협을 철저히 와해시켰고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켜 원기를 회복하였고

충분한 준비로 성공을 이뤘으며  남편 이치와 함께 공동으로 

<정관의 통치>를 전승하였고 '개원성세'의 '영휘지치'를 계승하였다.. 

당나라 시기 가장 발달된 시기였다.. 

이로서 측천무는 <천여년 내려온 고대 및 지금까지도 유일한 --여제>이고..

이 수식어는 측천무한테는 가장 합당한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측천무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아마 측천무는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음란하고 잔인하고 몰인정하다는

평가를 많이 듣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건.. 측천무는 그 당시 황후 자리에 있는 <왕황후>를

끌어내리기 위하여자기가 낳은 갓난 아기를 친히 목을 졸라 죽이기까지 하는 사건이 있다..

속담에 <호랑이는 독해도 자기 새끼는 먹지 않는다>란 말이 있는데..

하물며.. 측천무가 권력다툼을 위하여서 인간성을 상실하는 행위는 반드시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이다

더  섬뜩한 행동을 한 측천무.. 바로..본인이 황후 자리에 오른후

한고조유방의 황후인 여치(吕雉)가 했던 형벌을 그대로 본받아

자기와 총애를 다투던 왕황후와 소숙왕비(萧淑妃)를 함께 인지(人彘-돼지)를 만들었다

그 수단은 몹시 맵고 잔혹하여, 비인간적으로 형용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인간성을 멸절시키는 행위는 

측천무에  영원히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간성의 흑점이다

정치권리 쟁탈중에 원한이 있으면 갚고 원수가 있으면 복수를 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심지어 총애와 권력을 놓고, 명리를 다투고, 배은망덕하고, 음모를 꾸미는 것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털이 곤두 서는 섬찍한 수단으로

저항력이 전혀 없는 상대를 괴롭히면 약간은 마음이 변태적이다..

 

인지(人彘-돼지) 뭔가?

인지(人彘-돼지) 관한 형벌은 한고조 유방의 황후인 여치(吕雉)가 척부인(戚夫人)한테 형벌인데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지독한 형벌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 혀를 두른다..

형벌 진행방식은 자세하게 설명하면 너무 섬뜩하여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 몸에  도드라진 부분을 평평하게 하고

팔 다리를 잘라 옹기항아리에 넣어서 돼지굴에 놔둔다..

 

인지(人彘-돼지) 형벌을 받은 왕황후와 소숙왕비(萧淑妃)는 얼마 못가서 죽었고..

측천무는 분이 가셔지지 않은지  이사람들 죽은후에 머리를 자른고나서  완전 손을 뗀다.. 

 

그럼.. 왕왕후는 누굴 건들였고 어떤 행위를 했는지..

측천무로 하여금 하늘땅만큼 원한을 가졌고

비인간적인 섬뜩한 방법으로 왕황후를 처리했을가요?

 

무측천의 이 같은 변태스러운 행위에는 어떤한 논리가 숨어 있을까?

 

01, 왕황후 도대채 어떤 착오를 졌을가?

가엾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운 데가 있다는 옛말이 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경우 

우리는 반드시 두가지 방면에서 그 문제를 사고 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하나는 그가 자기절로 구덩이를 파서 본인이 구덩이에 뛰여들거나,,

다른 하나는 그가 너무 미련하여 남이 파놓은 구덩이에 뛰여드는 경우다..

 

측천무는 하극상  방식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왕황후를 모함했는데..

만약에 왕황후에 대해서 완전 뜻밖의 재난이라고 설명하면 그러러니 할텐데..

이것도 사람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필경 속담에 <파리는 틈이 없는 알은 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럼 왕황후는 도대체 어떤 악인을 심었을가? 

그는 응당 벌을 받을 행위를 한걸가?

아니면 억울한걸가?이 원인을 파악하면  측천무가  어떤 성격의 여자인지 알 수 있었다.

 

옛날에는 많은 유사한 옛말이 있다.. 

<고관대작의 저택에 들어서면 깊은 바다에 빠진것 같다>

<가장 인정이 없는 가정은 바로 황제집안이다>

이러한 옛말은 완전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경우가 많다.. 

신분과 상황이 때때로 우리 몸에 하나의 족쇄가 된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몸에 족쇄를 걸어놓은>상태로 춤을 추게 된다..

어떤땐 미천한 출신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고

생활에서 행복감이 없다..

하지만.. 고귀한  출신은 우리에게 끝없는 위험을 가져다 줄것이고..

평범한 생활을 할려도 어려움이 많다.. 

왕황후 운명의 비극은 내 생각에 그의 출신과 연관될것 같다..

 

왕황후는 <태원왕씨> 가족에서 출생하였다.. 

태원왕씨가문은 당나라 시기 유명한 <오성칠왕五姓七望>중에 한집이다..

왕황후의  할아버지 <왕시정>은 서위장군으로 상서좌복사 관직을 갖고 있다..

왕황후의  아버지 <왕인우>는 당나라 시가 관원이다..

뿐만아니라 왕씨가족과 당나라 황실과 친척관계가 있다..

당고조 <이원李渊>의 여동생 동안공주는 바로 왕황후의 작은할머니이고

왕황후의 어머니 위(魏)나라 부인 유씨 집안의 작은 할머니는 당고조의 외손녀가 된다..

여기서 보면 왕황후의 가족이 만만치 않은게  느껴지고..

황실가족이기때문에.. 명성이 자자하고..<광용귀족군사집단关陇贵族军事集团> 대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고귀한 출신으로 왕황후의 황후자리는 사실 당태종이 친히 정한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당태종에 관련하여.. 잠간 얘기 넣어볼려고 한다.. 

모두들 당태종 이세민이 역사적으로 매우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당 태종은 황제가 되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원인은 <광용귀족군사집단关陇贵族军事集团> 한테 눌려 허리를 펴지 못하고.. 항상 억울함을 당한다.. 

당태종 시기 <오성칠왕五姓七望>은 황실 이씨 가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들은 당태종 이씨 황실은 자기네 청해온  지금의 관리회사중개인으로만 생각하고 

황실과의 통혼을 하찮게 여긴다..

당태종 이세민은  화도 나고 민망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어..

나중에  천하의 《씨족보》 수정을 강행하였고..

자기네 이씨 황실가족을  <오성칠왕五姓七望>의 앞자리에다 적어놨으며 .

<오성五姓>간의 통혼을 금지하였고..

반드시 자기네 이씨 황실가족과 친척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규정했다..

맨날 황제 대접을 못받는 기분이 어떨가요?

하지만 이세민이 수나라의 양광<杨广>이 아니기에 때를 기다렸던것이다

왕황후는 이러한 원인으로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왕황후를 이치<李治>의 황후자리에 올려놓은거다.. 

앞에 설명하다싶이 왕황후의 가족은 이씨 황실가족을 자기네 아래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왕황후의 거만함이 이해 된다..

 

 사람들은 이치<李治>는 당나라 시기 매우 무능한 황제라고 얘기한다.

.왕황후도 꼭 같이 맨날 어리버리하고 몸도 부실한 이치<李治>를 무능한 황제라고 오해 하였다..

하여 왕황후의 행동거지는 거만하고 고집세고 담도 너무 컸다.. 

근데 이치<李治>황제는 전혀 무능하지 않다.. 

만약에 나약했으면 자기 아버지 거의 죽을 무렵에

아버지의 첩이였던 측천무를 꼬시지 않았을거다..

그럼 이치<李治> 유능함을 보여줄수 있는 사건이 뭐가 있을가..

바로 이치<李治> 황제자리에 오른후 

그의 아버지 당태종이  벌이지 못하는 과거제를  그와 측천무에 의해 할당되었고

그의 아버지 당태종이 감이 건드리지 못하는 관용귀족<关陇贵族>을

 측천무와 함께  해체하였다.. 

이치<李治>황제는 그냥 어리버리한체 한거다..

왕황후는 이치<李治>를 그냥 만만하게 봤고

이치<李治>가 꾀병을 부리는 호랑이란걸 생각못한것이다. 

 

이치<李治> 황제자리에 오른후.. 측천무는 세세대대로 내려온 제도때문에.. 

감은사(사찰)에 보내 비구니가 되었다..

(황제 돌아가면 자식없는 후궁은 반드시 사찰에 가서 비구니로 있어야 한다)

 

측천무한테 빠져, 일찍이 넋을 잃은 이치(李治)는 적막의 허전함을 표시하였다.

아버지 당태종 경야 중에도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감은사에 있는  측천무를 찾았다

그에 대하여 왕황후는  

<황제, 황궁에 산해진미 많은데 하필 몰레 밖에 나가 야생을 훔쳐먹냐,

당신이  황제인데 이 소문이 퍼지면 영향이 좋지 않다>고 황제를 완곡하게 타이릅니다. 

 

그래서  이치<李治>는 한동안 뜸했다..

하지만 황제로서 이치<李治>는 시간이 보귀한데..

이대로 허무하게 비워두면 안되는법이다. 

왕황후는 자기의 텃세를 믿고 수확을 갈망하는데.. 

황제 이치<李治>는 워낙 광용귀족<关陇贵族>의 미움과

아버지가 정해준 이 혼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왕황후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

왕황후에 대해서 좀 냉담하지만..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무지 예쁜 소숙왕비(萧淑妃)와 항상 붙어 있다..

 

이를 본 왕황후는 엄청 고통스러웠다.. 맨날 혼자 밤을 새면서..

 마음이 괴로웠고..이러한 경우면 쉽게 별의별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속왕비(萧淑妃)는 가족이 측천무에 비하여 많이 월등하다..

(측천무와 측천무의 어머니는 그의 武氏가족에서 쫓겨났다)

측천무를 밀어줘도  여우같은 소속왕비(萧淑妃)를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왕황후는 측천무를 왕궁으로 들여왔다..

왕황후는 어린탓으로 혹은 미련한 탓으로 선택을 잘 못 하였다..

소속왕비(萧淑妃)는 아무리 명문가족이라도

필경 그 집 가족이 왕황후 가족에 비해서 낮기 때문에

자기 행위를 어느정도 억제를 한다.. 

왕황후 본인 가족에 비해서는 소속왕비(萧淑妃)에 두려울 필요가 전혀 없는것이다.

하지만 측천무는 다르다.. 측천무는 가족 걱정이 없기때문에 

나대지 않거나,, 나대기만 하면.. 매섭고 모질다。

이런 사람은 지나친 구속은 없고, 오로지 욕망에만 의존하면 흔히 끝이 없다.

측천무가 총애를 받으면 측천무가 왕황후에 고맙다고 <언니,언니> 할가? 이건 오산이였다..

왕황후는 자기 무덤을 파버린거다..

 

측천무는 왕궁에 들어온후 본인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빠른 시간에 황제 이치<李治>의 총애를 받았다..

황제는 금방 소속왕비(萧淑妃)를 멀리하였고  왕황후 처지 또한..좋을수 없다.. 

 

위에서 왕황후가 한 행동을 보면.. 왕황후가 그렇게 나쁜여자라고 판단이 안된다..

그냥 여자끼리 생기는 질투뿐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질투는 정상적이라 목숨위협은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가족이다.. 

왜냐 하면 그 가족 광용귀족<关陇贵族>는 황제가 가장 미워하고 무서워하는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동맹을 잘못 선택하였다.. 

동맹은 보통 밉지만.. 선을 넘지 않고 , 자기를 존경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데

왕황후는 일체수단을 가리지 않는 독한 여자를 동맹으로 선택한게 잘못인것이다.. 

 

이쯤에서 측천무가 왕황후에 한 짓은 너무 한것 같다.. 

왕황후가 자기를 사찰에서 황궁으로 모셔온 은혜가 있는데.. 

왜서 왕황후한테 오싹한 형벌을 내렸을가.. 

 

02, 측천무는 왜서 잔인할가?

측천무  이 여자,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쉬운사람이 아니고..너무 독하고 손이 맵다

관건은 그녀가  너무 유능하고 담력이 있다

만약에 이런 사람을 생활 속에서 만난다면  가능한 한 멀리 피하거나,

정말 피할 수 없게 되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며 양보하는게 좋다..

 

측천무 사실상 귀족출신이다.. 아버지는 나무를 판매하는 사람인데 일찍이 기회가 좋아서 

이원<李渊>한테 귀속하였고 ,,당나라 세워진후 <국공国公>이란 관직을 가졌다..

또한 수나라시기 황실공주와 결혼하였다..

근데 이렇게 갑자기 성공항 가족은 내부가 많이 부실하기 마련이다.. 

자손들의 사고가 끊이지 않고 조중의 미움을 받게 되고 동료의 경시를 받게 된다..

측천무 12살 되던해에 아버지는 돌아갔고..

측천무는 형제가 없는 원인으로 武씨 가족 사촌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측천무와 엄마를 괴롭히고 

그들의 재산을 뺏았다..

이로하여.. 측천무는 엄마를 모시고 장안으로 와서 집을 잡고 살았다..  

 

장안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무렵

측천무 14살 되던해에 당태종 이세민 후궁을 선발하는 대회가 있었고.. 

측천무는 자기 미모를 믿고 혹시나 해서 신청을 하였는데 과연 합격되었다..

입궁하기전에 황실 출신인 엄마는 황실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딸의 입궁이 너무 걱정되었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딸은 단호하게 <엄마, 왜 그러세요? 입궁하여 황제곁에 가는데 

기뻐해주시지 않고.. 왜 울기만 하세요..>라고 얘기하였다.. 

 

측천무는 황궁에 들어가서야 느꼈다..

황궁의 생활은 다채롭지만.. 또한 어쩔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걸..

황궁에 들어가서 오품재인<五品才人>으로 임명된 측천무는 

당태동 이세민과 가까이 할수 있는 기회도 없다.. 

이는 측천무로 하여금 답답하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기다릴수밖에 없다..

 

오랜 기다림끝에.. 오늘 얼굴을 내밀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당태종 이세민한테 청피말이 있는데.. 너무 야생적이여서.. 사람들이 감히 길들이지 못한다.. 

이세민은 옆에 사람들하고 묻는다 <너희들 누가 이 말을 길들이면 크게 상을 주겠노라>

옆에 있단 측천무은 우선 손을 들어서 자기 방법을 얘기하였다..

<먼저 채찍으로 후려 갈겨서 말을 안들으면 망치로 두드리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비수로 말의 목을 찌르면 된다> 이말을 들은 이세민은 약간의 찬사를 줬지만..

이는 이세민을 가까이 할수 있는 기회는 아니였다..

 

측천무의 이러한 철혈성격은 이세민의 식은 피를 끓게 하기는 하지만

성숙된 이세민은 이러한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측천무는 황궁에서 고독한 하루하루를 12년이나 보냈고..

이세민이 병세가 악화될무렵에  측천무는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하여 발버둥쳤다..

 

태자신분이였던 이치<李治>는 병상에 있는 아버지 이세민을 시중들기 위하여..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고.. 측천무와 만나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측척무의 일부러 던지는 각종 유혹은 이치<李治>로 하여금.. 황홀하게 하고..

두사람의 불씨는 금방 확 달아올라.. 활활 타오른다..

 

이로 인해.. 측천무는 재빨리 이치<李治>와의 기회를 잡게 되고.. 

또 왕황후를 통해.. 순리롭게 이치<李治>의 후궁신분으로 되어 다시 입궁하게 된다.. 

측천무는 왕황후와 합작으로 소속왕비(萧淑妃)를 제거했으니..

측천무의  다음 목표는 바로 왕황후이다..

 

하지만.. 측천무는 왕황후의 탄탄한 가정배경을 잘 알고 있고 

황제와 잠자리를 자주 같이 한다고 해결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측천무는 본인의 능력을 슬슬 드러낸다..

그녀는  늘 궁녀 태감들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주군 하였다.. 

궁녀, 태감들은 평소에 사람 대접을 못받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완전 감동을 받는다.. 무마마님이 이렇게 자기들한테 잘해주는데..

그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충성을 다하는건 당연하다.. 

하여 여러번 이렇게 가고 오고 하면서.. 후궁의 거의 모든 하인들이

측천무의 측근으로 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측천무는 황제 베개옆에서 왕황후의 각종 루머를 불어댄다..

황제는 처음에는 듣고 약간의 의심을 갖게 되고.. 나중에 하인들 불러서

확인해보니.. 모든 하인들이 측천무의 측에 서서 얘기를 해주기 때문에.. 

황제는 점차적으로 측천무의 얘기를 믿게 된다..

여기서 한사람이 왕따 당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느끼게 되고

왕황후의 비극이 멀지 않아 보인다.. 

 

왕황후는 소속왕비(萧淑妃)를 제거하고 측천무도 제거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무서울게 전혀 없다고 말했고

황제가 내 편에 서기때문에 , 왕황후는 나를 물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후에 왕황후는 측천무를 누를 힘이 안되는걸 느끼고.. 

아예 자기쪽으로 끌어당길려고 하고..

측천무와 좋은 자매로 지낼려고 한다..

하지만 측천무는 겉으로는 친하게 진해는것처럼 하지만..

뒤로는 매우 왕황후를 무지 깔본다.. 

측천무는 오늘 후궁이 니 왕황후거지만..

낼은 후궁이 내거로 될수 있는데 내가 왜 니하고 좋은 자매가 될거냐고 생각한다..

그후로 측천무는 예쁜 공주를 낳았고 황제 이치(李治)는 엄청 기뻐하고 

매일 시간을 정하여 딸을 보러 온다.. 

왕황후도 좋은 마음을 보이기 위하여 자주 와서 측천무의 공주를 안아준다.. 

이성을 잃고 발광하는 측천무는 황제와 왕황후가 딸을 보러 오는 시간 규칙을 파악하여.. 

왕황후가 금방 떠나간후 황제가 오는 타임을 맞춰 전에 

본인이 직접 이불속의 아기를 목을 졸라 죽여놓고 

왕황후에게 화를 들씌운다..

왕황후는 당근 억울함을 표시하지만.. 황제 이치(李治)는 안믿는다.. 

결국에는 황제 이치(李治)는 왕황후를 황후자리에서 쫓아내고

측천무를 황후자리에 올려놨다.. 

 

측천무는 황후가 된후 즉시로 왕황후와 소속왕비(萧淑妃) 모두 냉궁에다 처넣었다.. 

하루는 황제 이치(李治)는 그래도 마음에 걸려

냉궁에 찾아가 왕황후와 소속왕비(萧淑妃) 를 봤다.. 

이 일을 알게 된 측천무는 

바로 왕황후와 소속왕비(萧淑妃) 를 인지(人彘)로 만들었고..

나중에 왕황후와 소속왕비(萧淑妃) 죽은후 그들의 머리를 짤라 버렸다..

이상의 측천무의 행동을 보면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무일도 할수 있는 

마귀같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의 신념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자기 앞길을 막는 돌은 부수서래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생활이 순조롭지 못해서 그녀의 인성이 더욱 왜곡되었고

그녀의 가치관에는 오직 한 가지뿐, 권력이 높을수록  가장 쾌활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왕 황후의 살해에 대해 원한은 말할 것도 없고,

딸의 죽음에 대해서도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사람의 마음은  철석같아서, 일찍부터 시비관·도덕관이 없었고,

그녀한테는 이익관만 존재한다..

 

03: 이 역사에는 무슨 복선이 있을가?

앞에 내용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이 역사 속에서  사실 여전히 매우 현묘한 이치를   세세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측천무 사찰에서 비구니로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순리롭게

어마어마한 권리와 가정 배경을 갖고 있는 왕황후를 쉽게 제거할수 있었을가?

옆에 누구의 협조가 없었으면 측천무 한사람으로 어림도 없었을거다..

그 현묘한 이치는 바로 황제 이치(李治)기

황후 배후의 광용귀족(关陇贵族)에 대한 태도인거다

1. 황제 이치(李治)는왜 왕황후를 멀리 했을가?

 

왕황후와 황제 이치(李治)의 결혼은 아버지 당태종 이세민이 친히 정해준 혼인이다. 

황제 이치(李治) 또한 효도스러운 자식이였고

왕황후도 매우 예쁘고 능력도 있고 학자가정에 태여났고

지식을 갖추고 사리에 통달한 여자로..누구라도 욕심낼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황제 이치(李治) 황제

는 왕황후한테 전혀 관심이 없고 엄청 거부를 한다.. 

왜서일가..??

왕황후 사람 자체가 잘못된것 아니고..

그의 가족이 문제 였던 것이다.

광용귀족(关陇贵族)은 일찍이 당나라 황실가족한테 많은 불쾌함을  갖다줬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평온해보이지만 뒤로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돈다.

황제 이치(李治)  한테 왕황후는 광용귀족(关陇贵族) 자기한테 붙혀놓은 원수같은 존재인거다

때문에 광용귀족(关陇贵族)는 왕황후에 대해서는 밉고 싫은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2. 황제 이치(李治)는 왜서 측천무를 선택했을가

후궁에 여인들사이에 아귀다툼은 항상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황후만은 누구도 못 건드리는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건 역대로 내려오는 고정 관념이기때문에 누구도 감히.. 이 관념의 선을 넘지 않을려 한다..

하지만 측천무는 다르다..

측천무는 이러한걸 눈에 넣지도 않고 겁도 없다.. 본인의 목적이라면,,

모든짓을 다 할수 있는 여자다.. 

더우기 측천무는 엄청 똑똑하고 월등한 정치사상을 갖고 있는 능력자이다. 

사실상 황제 이치(李治)가 측천무를 선택한건 올바른 결정이였다..

측천무는 결국에 황제 이치(李治)를 도와 

당태종도 무서워했던 광용귀족(关陇贵族)을 산산히 와해시켰다..

대표적인 사건은  '능연각' 공신 1위였던 <창앙순우지长孙无忌>의 죽음이였다..

 <창앙순우지长孙无忌>는 당태종 이세민의  좋은 형제이고..

황제 이치(李治)의 외삼촌일뿐만 아니라 고명공신으로 당나라 시기 유명한 인물이였다..

<창앙순우지长孙无忌>가 측천무의 황후 칭호를 반대한 원인으로 

측천무와  황제 이치(李治)에게 핍박받아 자살하고 말았고 

이로서 광용그룹<关陇集团>의 핵심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근데 황제 이치(李治)는 측천무가 능력자라는걸 생각못했고..

결국에  측천무는 기회를 틈타 자신의 심복을 많이 키워,

황제 이치(李治)로는 다시는 그녀를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3. 측천무는 진짜로.. 왕황후를 죽여야 했을가?

겉으로 보기에는 왕황후는 측천무와 별로 원수는 지지 않았다.. 

그것도 왕황후는 자기한테 은인 같은 존재이기도 한데..

측천무는 왜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왕황후를 죽혀야 했을가?

측천무가 왕황후에 대한 태도를 보면 속이 너무 좁아보이고..너무 악독해보인다.. 

하지만   뭔가 원인이 있을것 같다..

왕황후가 자기 황후자리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을때.. 

왕황후는 바로 자기 가족들한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럼으로 하여 황제 이치(李治)가 조정에서  측천무를 황후자리에 올릴려는 결정을 

많은 대신들의 반대를 받은거고..황제 이치(李治)가 어쩔줄 몰라하였고.. 그냥 손들고 말았다.. 

광용귀족(关陇贵族)을 대표하는 왕황후는 누구도 건들릴수 없는 존재이기에

측천무는 왕황후가 엄청 미웠고 본인의 걸림돌로 생각하기에.. 

왕황후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이러한 목적때문에 왕황후를 치를 떨 정도록 악한 수단으로 죽이는것과 

자기 목적달성을 위하여 친딸을 죽이는 행동을 보면 ..인간성이 너무 없어 보인다.

결국, 이 부분의 역사는 사실 황권이 관용그룹(关陇集团)에 대해 반격의 나팔을 불었던 것이고

측천무는  바로 가장 적합한 선봉관이였던 것이다..

측천무의 좌충우돌 하에서, 관용 집단(关陇集团)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물체도

뜻밖에 우중충한  충격으로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측천무는 확실이 능력있는 정치가이다..

역대 당나라 가장 골치 아파했던 백년동안 당태종 이세민도 못 건드렸던 이 그룹을

측천무에 의해 해결된 셈이다..

측천무의 지독함과 시원한 결단 및 총명과 능력은 결코 일반인들이 갖추지 못한 것들이다.

요컨대, 이 역사의 배후는 사실 한바탕 복잡한 정치권리 쟁탈이고.. 

여기서 측천무의 독한 마음가짐과 당나라 황제의 어찌할 방법이 없는 무능함을 볼수 있다..

 

04. 측천무에 대한 감탄

측천무는 본인 죽은후 글자없는 비석을 세우라고 하듯이.. 

후세사람들은 이 여인에 대해여 보통사람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측천무는 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사건도 많이 있었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한테 잘해줘 잘살게 만든.. 등등 업적을 보면 

어느 남자황제보다 더 잘했던것 같다.. 

사람이 일단 광마 상태에 빠지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되고 

측천무 권력 최고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은 극단적인 행위를 많이 했었고..

이런 사람은 이미 상식적으로 그녀를 판단할 수 없다.

지금 사회에서도 측천무에 겨냥할만한 사람이 있을가??

한 사람이 모질게 굴면, 육친도 몰라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물론,, 측천무의 이러한 성격은 사회 및 가족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 같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