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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전(官渡之战)이 끝난지 7년 넘었는데도

광활한 하북지역에는 여전히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여기서 만약에 원소(袁绍)가 조조(曹操)를 이긴다 해도

오히려 전쟁의 불길은 더 퍼질것이고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집과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는 원소(袁绍)내부에서 발생되는 모순때문이다..

 

원소(袁绍)의 지시에 따르면,

가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내란이 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동탁(董卓)이 난을 일으키면서부터

동한(东汉)왕조는 이미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각 군벌이 몇 개 군현을 차지하였고

몇 천 병마를 거느리면, 한 지역을 할거할 밑천이 생겼다..

이때 이 난투극 중에  원소(袁绍)는 강경하게

천하의 13주중--청(), 유(), 익(), 병() 4개주를

손아귀에 넣었고

휘하에는 <병사10만명, 말 만필>를 차지 하고 있어

화북지역의 거대한 대물이 되었다..

 

기득권 집단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대권의 안정적인 교체가 필수적이다..

원소(袁绍)한테는 아들이 3명이 있고

그때 전통으로는 반드시 큰아들 원담(袁谭)을

일찍이 후계자리에 올려놔야 한다

 

그러나 원소(袁绍))는 하필이면 원담(袁谭)과

차남 원희(袁熙), 조카 고갱(高幹)을 각각 한 주씩 거느리게 하였고

자기는 작은 아들 원상(袁尚)을 데리고

그룹의 핵심지역인 익주예성(冀州邺城)에 거주하였다..

 

상전의 이런 조작에 직면하여

모사 저수( 沮修)의 한 마디는 "필시 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원소(袁绍)의 이유는

이 아이들을 단련시켜 그들의 능력을 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의 내심은 원상(袁尚)이

점차적으로 내부 각 계파의 승인을 받아

형 원담(袁谭)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막내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건

일상에서 많이 보는 일이고.. 

더더욱 원상(袁尚)은 준수한 얼굴을 가진 잘 생긴 남자였으며.. 

생김새를 몹시 중요시하던 시절에는 분명 많은 인상을 주게 된다.

 

조조(曹操)가 죽을때까지 황제칭호를 하지 않은 원인중 하나가

본인의 용모에 자신이 없었고

남들이 <용모를 보면 군자 같지 않다>는 비웃음을 받을가봐였다고 한다

게다가 원상(袁尚)은 또한 원소(袁绍)의 정처 유씨의 편애를 받았고 

정처 유씨가 베개머리에서 부추기면 원소(袁绍)도 그 유혹을 떨칠수 없었고..

본인도 막내아들 더 사랑하는터라 속으로

꼭 막내아들을 후계자신분으로 만들 생각을 국건히 하였다

하지만 노련학 원소(袁绍)도 이게 쉽게 않다는걸 잘 알고 있고 

일단 마음속에 담아두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형세는 남보다 강하다. 

 

건안7년(서기202년)의 5월 관도전(官渡之战)에서 패전한

원소(袁绍)는 달갑지 않은 분노에 피를 토하여 죽으면서

전혀 원상(袁尚)을 후계자로 세우지 못했는데,

마침 원담(袁谭)이 청주(青州)를 통솔하도록 파견되었다.

 

이로서 최고 권력자리는  비여 있었고..

두쪽은 모두 병권을 갖고 있기때문에

내전은 일보직전이 되었다..

첫번째로 피살된 사람은 봉기(逢纪)였다..

이해 9월 조조는 리양(黎阳)에 주둔하고 있는 원담(袁谭)을 공격하였고

원담(袁谭)은 원상(袁尚)한테 구조를 요청하였고

원상(袁尚)은 소량의 병마만 보냈을뿐만아니라

봉기(逢纪)를 붙혀 감시하게 하였다..

이에 노한 원담은 봉기(逢纪)의 목을 잘라 제를 지냈다고 한다

 

봉기(逢纪)의 죽음은 결코 억울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봉기(逢纪)는 신배(审配)와 함께

원담(袁谭)의 좋은일을 파괴했기때문이다..

 

원담(袁谭)은 장남이긴 하지만

그의 통치하에 있는 청주(青州)의 민생은 정말로 엉망진창이였고

그 사람은 군주의 풍격을 전혀 없지만,

원소(袁绍)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전통에 따라 원담(袁谭)을 불러 계승시켰다.

 

그런데 하필 봉기(逢纪)와 심배(审配)는

줄곧 원담(袁谭)을 지지 하는

신평(辛评)과 곽도(郭图)와 관계가 안좋았고..

만일에 원담(袁谭)이 군주자리에 앉게 되면

신평(辛评)등은 반드시 세력을 가지게 되고

자신들한테 불리하게 되는건 당연할거라고 생각한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봉기(逢纪)와 신배(审配)는 먼저 손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상(袁尚)을 예성(邺城)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돌아온 원담(袁谭)이를 성밖으로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였다.

 

이때부터, 권력의 유혹과 친신의 부추김으로

두 형제는 마음에 틈이 생겼고  

다음해 5월 조조가 물러난후 예성(邺城)내에서는

두 형제의 내전이 폭발하였다.

 

본래 조조(曹操)는 승승장구하여,

일거에 여양(黎阳)에서 예성(邺城)으로 쳐들어갈 작정이였지만

곽가(郭嘉)가 말렸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토끼도 급하면 사람 문다고 하는데..

더더욱 그들은 형제이기때문에 급하게 몰아넣으면

그들이 서로 합작하게 될것이고 우리한테 불리하게 될것이다.. .

오히려 우리가 물러나고 .. 두 형제는 외부의 압력이 없으면 

내부의 모순이 폭발할거고 곧 서로 싸울것이며

우리는 옆에서 기다렸다가 

저절로 굴러오는 승리를 잡으면 될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조조(曹操)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원담(袁谭)은 신평(辛评)과 곽도(郭图)의 부추김하에 

동생 원상(袁尚)과 싸우게 된다..

하지만 형 원담(袁谭)은 무기력 하고 능력이 안되여 

혼전속에서 패전하고 남피(南皮)현으로 물러났다.

 

당시만 해도 조조(曹操)는 관도전(官渡之战)에서 7만여 명을 참살하고도

원가(袁家)의 두터운 기반을 흔들지 못했거니와

 원소(袁绍)는 전후에도 반란을 일으킨 지역을 되찾아 그 위세는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큰 덩치 때문에 내부 파벌들이 즐비하고

암투가 끊이지 않는 것도 약점이였고

이른바 '병사는 많은데 분화는 분명치 않으니,

장교들은 교만하고 명령은 일치하지 않는것'라는 것이다.

원소(袁绍)가 세아들들에게 각각 한 주씩 이끌게 된 것도,

어느 정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은 최적해 한것이고

필경 친아들이기때문에 하북토족가족들보다 믿을수 있기때문이였다

 

원소(袁绍)가 살아있을때만 해도

자신의 위망(威望)이 어느정도 있기때문에

밑에 사람들을 누룰수 있지만

그가 죽으면,

각 파벌은 반드시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해

종룡공신(从龙功臣)의 광이 되고 싶어 했을수 있다

물론 원씨(袁氏)집안의 형제들은

대국을 위하여 단결을 우선으로 하면 

적어도 겉면상의 통일은 유치할수 있으며

이것만으로 갖고 원씨(袁氏)집안은 천하를 제패할 만하다.

 

이점은 원담(袁谭)의 부하 왕수(王修)가 잘 알고 있었다..

친형제가 마치 사람의 두손과 같은 존재인데 

남들과 결투하기 전에 오른손을 자르고 나서

"내가 이겼다"고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형제는 두손으로 다른사람과 결투할때

왼손을 짜르고 <내가 이겼다>고 외치면 되는건가?)

 

하지만 필경 원담(袁谭)이 속에 매듭을 풀어놓는다해도

동생 원상(袁尚)이 형한테 기회를 안줄려고 한다.

건안(建安)8년의 10월 원상(袁尚)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담(袁谭)이 있는 평원현(平原县)을 포위하였고

이 악박을 못이겨 원담(袁谭)은 

饮鸩止渴(목이 마르다 하여 독이 든 술을 마셔 갈증을 푼다)로 

하필 조조한테 귀순하여 구조를 요청하였다

 

원담(袁谭)의 투항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도미노효과를 초래하였다..

원씨(袁氏)집안에 속했던 소유(苏由),

한범(韩范), 량치(梁岐)등 하나둘씩 조조한테 투하을 하였고

조조도 응쾌이 받아서 작위(爵位)를 상으로 주는걸로

더 많은 원씨(袁氏)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다음해를 기다려 시기가 되어 조조는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심배(审配)가 지키고 있는 예성(邺城)을 포위하였고

5월부터 쌍방은 서로 이기거나 지거나 하면서,

거의 모든 공방 수단을 다 썼고 

8월에 와서 예성(邺城)은 함몰되지 않았지만

성내에 있는 백성들은 절반이상 굶어죽어갔다..

 

그렇다면 주재해야 할 원상(袁尚)은 뭐하고 있는걸가? 

말하자면 풍자적인데 

이 생사가 걸린 시간에  원상(袁尚)은 여전히 평원에서

원담(袁谭)과 3개월동안 서로 싸웠고

원상(袁尚)이   철군하여 구원할 때에 조군의 일촉즉멸에 이르렀다..

부하 마연(马延), 장이(张顗)는 임점투항을 하였고

혼란속에서 원 씨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수(印绶)와 옷가지 등이 모두 조군에 뺏겼다..

 

이로서 원씨(袁氏) 본거지인 예성은 함락되고,

심배(审配)는  죽임을 당하였으며

원씨(袁氏)  집안의 대세는 이미 사라졌다.

고승(高幹)은 병주(并州)를 갖고 조조한테 투항하였지만 

뒤이어 피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고
원상(袁尚)은 유주(幽州)로 도망가 원희(袁熙)를 찾았으며 

원담(袁谭)은 다시 조조를 배반하여 두개월후

조씨(曹氏)집안의 제자인 조순(曹纯)에서 피살되었다..

이때는 건안(建安)10월 정월(서기 205년) 이였고

이는 원소(袁绍)가 돌아간지 2년밖에 안된 시점이였다

원담(袁谭)인 죽고난후 이어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의 내부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손쓰기전에

원희(袁熙)의 부하인 조추(焦触), 장남(张南)은  

먼저 원가(袁家)형제를

요서(辽西) 소수민족인 오환(吳環)이 있는 곳으로 몰아갔다.

 

유주(오늘의 하북성) 는 그때 당시

한조(汉朝)나라의 북부 변두리 변경쪽에 위치하였고

주변은 모두 소수민족 구역이 엄청 많았고

중 타뚠찬위(蹋顿单于)가 인솔하는 

오환(乌桓)부락이 가장 강대하였다.

 

다행이 원소(袁绍)가 유주(幽州)를 차지한후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타뚠찬위(蹋顿单于)는 원씨(袁氏)집안과의 의리를 위하여

원씨(袁氏) 고향을 회복하는 것을 돕기로  출병에 나섰다..

그 바람에 워낙 조용하지 않았던

북방은 다시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건안(建安)11년 (서기 206년) , 조조(曹操)는

곽가(郭嘉)의 권유로 경기병(骑兵)을 이끌고 조용히 출격하였고

한길에 백단(白檀), 평강(平冈), 류성(柳城)을 지나

그해 8월에 백랑산(白狼山)에서 

타뚠찬위(蹋顿单于)와 원희(袁熙),원상(袁尚)이 조성한

수만명의 연합군을 만났다..

 

조조(曹操)는 높은 곳에 올라가 상황을 알아보는데,

오환(乌桓)은 비록 사람이 많았지만 군기가 흐트러지고

부대가 정비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산넘고 물건너 멀리 이 추운지역에 온것도

단지 한 가지 일을 다 끝내기 위해서였으며..

바로 원시(袁氏)네 잔세력을 철저히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좁은 길에서 적을 만나면 용감한 쪽에서 이긴다고

조조(曹操)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료(张辽)를 선봉으로 하는 조군(曹军)호표범(虎豹骑)들은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한차례 격렬한 전투끝에 타뚠(蹋顿)은 그자리에서 참살되었고

조조(曹操)는 한번에 료서(辽西) 지역 20여만명의 인구를 얻었다..

 

타뚠(蹋顿)죽고난후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은

천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료동태수(辽东太守)공손강(公孙康)한테 찾아갔다

 

조조(曹操)의 많은 장군들은 추격을 요청했지만

조조(曹操)는 철수를 선택하였고

그는 공손강(公孙康)이

원 씨(袁氏) 두 형제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과연 료동(辽东)으로 간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은

결코 분수에 만족하지 않고 

공손강(公孙康)에게 해를 끼칠 궁리를 하다가,

공손강(公孙康)에게 들통났다.

 

그래서 공손강(公孙康)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유살하고 조조에게 그들의 머리를 바쳤다..

 

사실 조조(曹操)는 당초 곽가(郭嘉)가 권했던 것 처럼 

궁구막추(穷寇莫追)의 방법을 선택했던거고

그는 원씨(袁氏)집안의 형제는 외부의 압박이 없어지면

공손강(公孙康)과 내부다툼을 할것이라는걸 분명이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원씨(袁氏)집단의 뼈속에 묻혀있는 고질병인것처럼

결국에는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것이다.

 

어쨋던간에 건안(建安) 11년 겨울 하늘을 스쳐 땅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한때 군림했던 원씨 집단은 이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당초 조조(曹操)와 원소(袁绍)가 함께 기병(起兵)할 것을 생각하면,

원소(袁绍)만은 하북 연조(燕赵)의 땅과 통솔자인 이적(夷狄)을 제치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세력을 다툴 생각을 하였다.

조조(曹操)는 자기가 천하의 지략 있는 사람들을 모아 자기가 쓸 수 있도록 하고

이걸로 천하를 종횡무진하겠다고 말하였다..

 

만약 삼국지 저자가 의도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니라면,

이 대화에서 구도의 고저(高低)는,

아마 이때부터 원조(袁曹) 두 집안의 운명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후세 독자들로 하여금 탁식을 금치 못하게  하고 감개무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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