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보면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이중 누구의 실수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유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업을 시작하였고
조조(曹操), 손책(孙策)에 비하면 창업의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빼앗은 대군서주(大郡徐州)도 지키지 못하고
장비로 인하여 잃고 말았다
제갈량을 청해서야 비로소 자기의 발전 전략을 분명히 했고
형주의 적벽대전을 거쳐 형주의 몇개 성을 점유하였으며
또한 손권(孙权)한테서 강릉(江陵--지금 호북성 형주)을 빌려
어느정도 자리매김은 하였다..
익주를 공략후 삼고초려 융중대(隆中对)에서
2차 전략을 실현하게 되며
한중(汉中)을 공략하고 한중왕(汉中王)에 오른 후
유비의 사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관운장이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바람에
유비는 군사를 거느려 이릉에서 오나라한테 참패이후로
촉한의 사업은 내리막길릴을 걸었다..
유비 죽은후 충칭 백제성에서 제갈량한테 탁고한후
제갈량은 남방을 평정한후 북벌을 시작하였다..
결국 형세가 아주 좋은 상황에서
사람을 부적절하게 썼기 때문으로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고말았고
이로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의 공은 물거품으로 되거 만것이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어떤 실패가 촉나라를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본인 생각은 당연히 관운장의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패전이다..
1. 장배가 서주(徐州)를 잃을 당시는
유비의 사업이 창업단계였기때문에
이 실패는 유비한테 주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조기에 창업하여,
줄곧 부평초처럼 근거지도 없고,
실력도 별로 없었으며 후에 갈데가 없어 자기 친구였던
공손찬(公孙瓒)한테 의탁을 하였다..
유비와 공손찬(公孙瓒)은 한나라왕조 말기에
노식(卢植)의 학생이였다
공손찬(公孙瓒) 있는곳에서
유비는 평원령(平原令)이란 작은 관리직을 가졌고..
평원(平原)일때 유비는 계속해서 인심을 매수하여
한 자객이 모두 유비에 감동하여
암살 계획을 포기하게 하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도겸(陶谦)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후,
조조는 서주(徐州)를 도살하였고
도겸(陶谦)은 사람을 여기저기에 보내 구원병을 얻어오게 하는데
오직 유비만이 관운장과 장비를 인솔하여
서주(徐州)로 왔으며
때마침 여포(吕布)가 조조의 후방에서
소란을 피우자 조조는 그 여세를 몰아 퇴병하였다.
도겸(陶谦)이 죽은후 서주(徐州)의 현지 관원들은
유비를 서주목(徐州牧서주주인)으로 섬겼으며
유비도 기쁜마음으로 서주(徐州)를 다싀게 되었다..
하지만 곧 여포(吕布)가 와서 유비한테 귀속하였으며
유비도 여포(吕布)를 받았줬다..
마지막 여포는 장비가 술에 취하였고
유비와 관운장은 원술(袁术)과 싸우는 틈을 타
서주(徐州)를 뺏고 말았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어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말았지만..
이는 유비한테는 큰 영향은 없다..
왜냐 하면 나중에 유비가 허도(许都)에서 탈출해
다시 서주(徐州)를 차지하다가
조조에 패전하여 관우마저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다.
하여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지 않아도
나중에 조조가 서주(徐州)를 공격하게 되면
유비는 지킬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에
장비가 잃은 서주(徐州)는
유비의 창업에 주는 영양은 별로 없어보인다..
2. 제갈량은 다섯차례 북벌에서 모두 성공을 못 거뒀기때문에
마속(马谡)이 가정(街亭) 을 뺏긴것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후 제갈량이 국정을 주관하게 되고
제갈량은 유비의 한나라왕조의 부흥 소원을 잊지 않았다.
하여 내정에서 일정한 성과를 걷은후
우선은 남방을 평정하여 안뜰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청두로 돌아온후 유선(刘禅)한테 <출사표(出师表)>를 올렸으며 이
로부터 북벌을 시작하였다
제갈량은 처음으로 북벌에 나섰는데,
조위(曹魏)는 어떠한 사상적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조위(曹魏)가 장합(张郃)을 보내 맞설때
제갈량은 마속(马谡)을 보내
가정(街亭)를 지키게 하였는데
결국에 마속(马谡)은
제갈량의 뜻에 따라 진을 치지 않고,
가정(街亭)을 잃으므로
제갈량의 첫 북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제갈량이 북벌할 때 군사는
위나라에 10분의1정도밖에 안되었다..
병사든 무장이든 병참이든 간에 볼 때
촉한은 모두 열세에 처해 있고,
더우기 제갈량은 안정적 진도를 요구하였기때문에
일차 북벌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북벌의 성공이 가능하지 않기때문에
마속(马谡)의 가정(街亭)을 잃은것은 대세에 상관없게 되고
때문에 나중에도 촉한의 운명에 주는 영향은 별로 없어보인다.
3. 관운장이 형주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에서
전략를 날려버린것으로 유비한테는 가장 치명적이다
삼국지에서 관운장에 관하여 높이 받들고 있는것 같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관운장은 손권의 여몽(吕蒙)장군보다
못해보인다고 생각한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머리 숙일줄 모르고..
사실은 여몽(吕蒙)등 손권밑의 장군들보다
총명해보이지 않은데..
너무 자신감이 넘쳐 날들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비가 한중(汉中)을 공략후 그의 업적은 절정에 이르렀고..
이는 용중대()에서 얘기했던 전략중 두개를 완성한셈이다.
이제 세번째로 형주(荆州)와 익주(益州)
두 갈래로 북벌에 나서면
장안(长安)과 낙양(洛阳)에서 만나게 되여
유비의 목표가 완전 실현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한중왕(汉中王) 자리에 올랐고
동시에 관운장, 장비, 마초(马超), 황충(黄忠)을
전후좌우(前后左右)사장군(四将军)으로 임명하였으며
관운장한테는 병사를 컨트롤할수 있는 권리를 줬다..
결국에 관운장은 바로 양번(襄樊)전투를 발동하였고..
더더욱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는 7군을 수몰하였고
우금(于禁)을 사로 잡았으며
방덕(庞德)을 죽여 화하(华夏)에 위세를 떨쳤으며
조조는 놀라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손권(孙权)과 신의를 버려
손권은 여몽(吕蒙)을 보내
백의도강(白衣渡江)하고, 뒤에서 관운장를 기습하였다.
결국에는 관운장은 큰 실수로
형주(荆州)를 잃고 본인도 잡혀서 참살당하였다
관운장이 형주(荆州)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의 전략에서
두갈래로 북벌할려는 계획이 파괴되었고
이때문에 이릉대전(夷陵之战)을 유발하였으며
유비의 패전으로 촉나라는 이때부터 내리막길로 달렸다..
제갈량은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했지만 힘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관우가 형주를 잃고 촉한의 멸망을 결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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