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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2021.02.10
- 2021.02.05
서기 219년 되던해 관운장은 손권의 장군 여몽한테 사로 잡혀 손권한테 살해당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비와 큰 원수를 지게 되었다..
유비는 관운장을 잃으므로 동오손권한테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고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원이 풀리지 않을것 같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듯한 분노는 유비로 하여금 이성은 잃게는 하지 않았고
필경 동오가 어느정도 강대한지 알고 있었기때문에
관운장이 죽은후 바로 동오를 찾아 원수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갈량의 도움으로 꼬박 3년 동안 정력을 기르고서야
동오에 출병하려고 하였고.. 끝내 서기 222년에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유비는
삼군을 결사시켜 동오의 손권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점장대에서 유비는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라고 명령하여고..
본인은 제갈량과 함께 육군을 인솔하여 호호탕탕하게 동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번 유비는 전국의 병력을 모질게 모아 동오를 섬멸하기 위하여 출발하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손권을 없애.. 관운장의 원수를 갚을 생각만 가득하다..
유감스럽게 유비가 동오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였고 자신의 실력도 과대평가하였다..
유비의 군대가 동오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권은 이미 이릉에 병사를 매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비는 대패를 초래하고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전투는 또한 삼국의 철저한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되었다고 한다..
유비도 이번 동오의 토벌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게 되었고
패배한 병사를 이끌고 백제성에서 하늘의 불공평을 웨쳤으며
자신의 무능이 형제의 복수를 해주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자신때문에
강산은 원기가 꺾이고 휘하들은 더 큰 손해를 보게 되고 말았다..
<이릉대전>은 유비로 하여근 우울에 빠지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고
사후의 처리를 해야 하기때문에 제갈량을 불렀으며
제갈량한테 마속(马谡)은 너무 허위가 많다고 강조 하였고
항상 뒷북 치기때문에 절대로 중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유비가 사후 처리에서 충직한 조자룡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평소 유비는 조자룡에 대한 태도를 관찰해보거나..
게다가 몇몇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유비는 조자룡에 대해
꽤 미사여구를 가지고 있으며 부하들한테 조자룡을
중용해서는 안된다는걸 암시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유비의 일생에서 조자룡을 한번도 중용하지 않았다는걸 발견할수 있는데
이는 왜서일가? 필경 조자룡은 천하제일 장군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소설적 관점에서 보면 유비가 조자룡을 쓰지 않는 것은
손해이자 유비에게 인생에서 큰 패착이었다.
그러나 실지역사를 살펴보면 소설이나 영화처럼
유비와 조자룡의 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때문에 유비가 왜서 천하제일장군 조자룡을 중용하지 않은지..
원인을 찾아볼려면 우선 조자룡의 일생을 분석으로 찾아보자..
역사상에서 조자룡은 처음부터 유비를 따른것이 아니였고
초기에는 그때 강한 세력을 가졌던 공손찬을 따랐었고..
공손찬과 함께 할 초기에는 조자룡은 어려서부터 정의가 가득한 성격을 가졌으며
어릴때부터 백성을 위해 목숨을 청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효웅(枭雄)을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조자룡의 마음속에서는 효웅(枭雄)은 그냥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생각하며
효웅(枭雄)은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때문에 그는 재능이 넘쳐나도 절대로 조조를 따르지 않은 원인중의 하나였으며..
공손찬을 따르게 된 원인은 바로 공손찬이 처음에 백성을 위한 마음이 있었고
이는 본인의 뜻과 비슷하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공손찬도
부귀 속에 빠져 효웅(枭雄)의 길을 걷게 되자 조자룡은 공손찬을 떠났다..
마침 당시의 유비는 인의의 명의로 기병하였고,
또한 사람됨이 상당히 정의로웠기때문에 공손찬에 실망을 느낀
조자룡은 유비한테 가입하여 본인의 뜻을 이룰걸 갈망하였건만..
유비의 정의는 그냥 겉으로 부각되었고..
그의 속내는 여전히 다른 효웅(枭雄)과 다를바가 없는 야심가였다..
유비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미 손에 들어온 형주를 밀어 버릴 수 있었고
훗날 동오(东吴)를 토벌하면서 크게 패배한 촉한(蜀汉),
그리고 유비가 탁고하는 과정등등을 보면 유비의 정치에 대한
야심은 조금도 변화지 않았다는걸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제갈량을 꺼려했고 혹시 본인이 죽은후
아들 유선(刘婵)이 제갈량을 제어할수 없을가봐 겁이 났으며
겉으로는 자리를 제갈량한테 내주는척 하면서
제갈량이 중간에서 호기를 부려 촉한의 강산을 빼앗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제갈량이 어떤 분이시라고.. 유비의 이러한 낌새는 단번에 알아차렸고..
그 속내를 잘아는 제갈량은 견결히 유선(刘婵)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의와 정의로움이 아님을 증명한
유비탁고(劉備탁고)의 마음 씀씀이가
깊고 모략이 비상하다는걸 누구도 느낄수 있을것 같다..
유비가 쓰촨을 통치하고 있을무렵..
자금 부족이 엄청나기 때문에 화페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로하여 백성들은 많이 힘들어했으며
그것도 아랑곳안하고 유비는 백성들한테서
세금을 엄청 받아들였다고 한다..
삼국시기 많은 효웅(枭雄)중에
유비가 이끄는 쓰촨의 백성들 바쳐야 할 세금이 가장 많았다고 하였으니
마음 한구석이 정의롭기 그지없는 조자룡이 겉으로는
정의롭지만 실제로는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비를 못마땅하게 여길 리 만무하다.
유비와 조자룡의 갈등이 날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익주(益州)에서부터이고 역사책에 따르면
유비가 형주를 얻은 뒤 교통로를 뚫기 위해
익주(益州)를 탈취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비한테 귀속한지 얼마 안되는 조자룡은 공을 세워
유비한테 보답을 하고 싶어했기때문에 유비는
조자룡을 군사를 인솔하여 익주(益州)를 탈취하게 하였고..
조자룡은 처음으로 작전을 지휘하였는데
유비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빠른 시일로 익주(益州)를 뺏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익주(益州)를 탈취한 뒤 부하 장교들은
전리품을 나눠 가지라고 유비에게 요구함으로써
병사들의 용맹을 북돋을려줄려고 하는데 유비의
이 계획을 들은 평소 말수 적은 조자룡은
이번은 벌떡 일어나 반대의사를 표하였고 ..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백성을 행복시키겠다는
당초 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서에 따르면 당시 유비는 조자룡의 체면에 반론을 펴지는 않았고,
부하의 뜻에 따라 토지를 나눠주지 않았지만..
유비의 마음속에는 조자룡에 대하여 응어리가 생기게 되었고
조자룡의 방해에 유비는 마음이 언짢았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조자룡은 훗날 전투에서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실지적으로 가장 큰 야심가라는걸 알수가 있다..
유비는 부하가 그를 위해 출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부하의 이익을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철없는 조운은 오히려 천하의 백성들을 끌어들여
유비를 결박하여, 유비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또한 조자룡의 마음속에는 유비가 인의를 내세워 기병하였으니
조자룡의 마음속에서 유비가 인의(仁義)로 기병한 이상
지도자인 유비가 앞장서서 백성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
인의(仁義)를 저버리는 스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고 생각한다.
.두사람의 관념이 서로 다르며..
한사람은 천하를 통령할려는 효웅(枭雄)이고 하나는
마음속의 목표를 위하여 싸우는 진짜 영웅이다.
두 사람이 문제를 보는 출발점이 다르면 결과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연히 모순이 생기게 되면 대응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나라수령인 유비가 보기에 조자룡은
비록 중요한 리더의 자리에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조자룡의 능력은 긍정적이며 이념은 다를뿐으로
직위를 이동시켜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방법이다..
또한 조자룡이 적군에 부착하게 되여 생기는 적의 위협을 피면할수 있으며 ,,
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게 하니, 어찌 모두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다들 아시겠지만 조운의 익주전은
그의 인생의 절창이 되었고, 이후의 전쟁터에서도
이 절세의 장수의 자태를 찾아볼 수 없었고
후방부장인 조운은 유비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에는 유비는 조자룡을 봉쇄하였고
이는 쌍방의 이념이 다르기때문이지만 유비는 조자룡을 놓지 않았다..
놓았다가 조자룡이 다른 수령한테 붙게 되면
본인한테 엄청난 위협이 되기때문이다..
그래서 유비는 조자룡을 경호원으로 배치하는 게
적격이라고 생각하였고
만약 조자룡이 외면 때문에 더 이상 유비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려 한다면,
유비도 그를 가차없이 죽일 것은 당연한것이다..
한 시대의 효웅(枭雄)은 이미 알고 있는
위협이 통제되지 않는 존재로 하여금 계속해 나갈 수 없게 하였고,
조자룡도 이 도리를 알기때문에 유비를 평생 성실히 보호하였다고 한다..
저 본인도 삼국지를 보면서 사실은 유비가 가장 마음에 안들었다..
삼국지에서 키가 9척이나 된다는 관운장의 키,, 지금의 어느정도 키가 될가.. 새로 출토된 한나라시기 자(尺)에서 답안이 나왔다고 한다 (0) | 2021.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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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삼국지에는 무장뿐만 아니라 미녀도 많으니, 삼국지 10대 미녀 알아볼가요? (0) | 2021.03.16 |
삼국지에서유비의 여섯 번의 큰 울음은 가식일까, 아니면 진짜 쓰라린 걸까. (0) | 2021.03.02 |
삼국지에서 관도전(官渡之战)은 사실 결코 관건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원씨 집단이 멸망한 진짜 원인이다. (0) | 2021.02.23 |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史记·孔子世家)>에서 공자(孔子)의
키가 9척6촌(九尺六寸)으로 사람들은
<장인(长人-키가 가장 큰 사람)>으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보아하니, 역사상 문성인으로서,
공자(孔子)는 지금까지도 그의 높은 학식이 알려졌을뿐만 아니라,
키도 훨씬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럼 사마천이 얘기한 공자의 키 9척6촌이 현재수자로 하면 얼마나 클가?
공자의 신장(身长)에 대해서 지금까지 두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현대 대다수 학자들은 사마천(司马迁)이 기록한
<사기(史记)>는 서한(西汉)시기였고
그가 얘기한 9척6촌(九尺六寸)은
한나라(汉朝)왕조시기의 자(尺)로 나온 수자였다고 인정하였다..
출토된 문물과 일부 역사서적의 기재에 따르면
서한(西汉)시기의 한자(一尺)는 대략 지금의 23.1센치메터정도였다고 하고
이를 계기로 공자의 키를 가늠한다면 약 2.21메터였다고 한다..
이정도의 키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고대뿐만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많지 않은 키높이였다..
위에 해석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 학자들은 공자의 키가 2.21메터 결코 아니였다고 한다..
이분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记)>는 사마천이 한조(汉朝)시기에 만들긴 했지만
그가 수집한 역사자료들은 모두 앞에 조대에서 얻은거였고
공자의 키가 9척6촌이란 수자는 앞에 조대의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가 생활했던 시기는 춘추시기였고 그당시의 한자(一尺)의 수치는
지금의 약 19.7~19.9센치메터정도였다고 하고.
이걸로 기준으로 할경우면 공자의 키는 약 1.9메터 정도였다고 한다..
이수자가 맞는것 같다.. 2메터 이상이면 이상할수 있는데
그래도 1.9메터이면 현재사람으로도 엄청난 큰 키였다..
공자의 키가 1.9메터인지 아니면 2.21메터인지..
확실히 정확한 답을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왜냐하면 이두가지 해설이 모두 맞는것 같기도 하다..
어느 답안이 가장 정확한지..
아마 고고학자들 더 많은 자료들 찾아봐야 할것 같다..
만약에 어느 하루 고고학자들 공자의 묘를 파괴안한 전제하에서
공자의 남아있는 유해로 키를 가늠한다면 정확한 답안이 나올수도 있다
고대 역사상에서 성인(圣人)이 두분 있었고
그중 한분은 문성(文圣) 공자(孔子)이고
다른 한분은 무성(武圣)관운장이다..
공자가 생활했던 조대는 지금부터 너무 먼 옛날일뿐만 아니라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은 춘추시대여서
공자의 구체적인 키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 ..키가 9척이 된다고 하는 관운장의 키는 현재수자로 어느정도 될가?
나관중(罗贯中)은 <삼국지>에서 관운장에 대하여
"키는 9척, 수염길이는 2자"라고 묘사하였고..
그래서 관운장한테 유명한 미염공(美髯公)이란 별명이 생겼다..
고대사람들한테.. 관운장의 9척되는 키는 그의 긴 수염과 함께 유명하였고..
이 키높이는 고대에서는 보기드문 무적맹장군이였다..
그럼 관운장의 9척되는 키,, 현대 치수로 어느정도 될가?
마침 새로 발견된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한
자(尺)에서 명확한 답안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 관운장의 키높이에 관련하여 전에 몇가지 해설이 있었고
문물등 물증의 증명이 없는 상태이고
다만 역사책의 기재로 관운장의 키높이를 가늠하기때문에
정확하다고 말할수 없다..
예를 들어 이중톈(易中天) 선생이 관우의 키를 2.07m라고 하는건
그가 참고한 한자(一尺)는 지금의 23.04cm에 해당한다,,
하지만 조조무덤에서 출토된 문물에서 발견한데 의하면
키높이가 7척이 되는 조조의 키는
현재 치수로 그의 실제 키높이가 1.55메터밖에 안된다,,
이 수자가 정확하다면 조조의 키가 저만 하네요..
이상태로 계산한다면 관운장의 실제 키높이는 1.99메터정도이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키높이인것이다..
이렇게 차이 나는 데는 그냥 각 조대에 따라 한자(一尺)의 단위와
지금 메터랑 계산이 어떻게 다른가에 따른다..
사실은 사기()에서 관운장의 키높이에 관련하여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관운장의 키가 9척이 된다는건 ..
그냥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뿐이였다..
만약에 관운장의 키가 9척이라면
낙양(洛阳)동한(东汉)무덤에서 출토된 자(尺)로 계산해보면
관운장의 키가 대략 2.2메터 정도 된다..
왜냐하면 한나라시기의 한자(一尺)는
지금의 단위로 약 23.4센치메터라고 하고
이는 역사책에 기록된 한자(一尺)의 길이는
약 23.39센치메터 랑 거의 맞는다
사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맹장이 된 관운장의 키는 작지 않을 것이고,
최소한 2m 안팎일 것이다.
고고학 무덤에서 출토된 고대인들의 유해는 모두 키가 크지 않았다고 하지만
간혹 몸집이 큰 사람들도 있었고
예컨대 중산정왕 류성(劉勝)의 경우 유승묘에서 출토된
금루옥의(金缕玉衣)를 보면
유승의 키는 최소 1.9m가 넘고 부인도 1.75m나 된다.
조자룡은 유비한테 중시를 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유비는 임종에 조자룡을 중용해서는 안된다고 유언을 남겼는데 왜서일가? (0) | 2021.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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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삼국지에는 무장뿐만 아니라 미녀도 많으니, 삼국지 10대 미녀 알아볼가요? (0) | 2021.03.16 |
삼국지에서유비의 여섯 번의 큰 울음은 가식일까, 아니면 진짜 쓰라린 걸까. (0) | 2021.03.02 |
삼국지에서 관도전(官渡之战)은 사실 결코 관건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원씨 집단이 멸망한 진짜 원인이다. (0) | 2021.02.23 |
삼국지에서 보면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이중 누구의 실수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유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업을 시작하였고
조조(曹操), 손책(孙策)에 비하면 창업의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빼앗은 대군서주(大郡徐州)도 지키지 못하고
장비로 인하여 잃고 말았다
제갈량을 청해서야 비로소 자기의 발전 전략을 분명히 했고
형주의 적벽대전을 거쳐 형주의 몇개 성을 점유하였으며
또한 손권(孙权)한테서 강릉(江陵--지금 호북성 형주)을 빌려
어느정도 자리매김은 하였다..
익주를 공략후 삼고초려 융중대(隆中对)에서
2차 전략을 실현하게 되며
한중(汉中)을 공략하고 한중왕(汉中王)에 오른 후
유비의 사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관운장이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바람에
유비는 군사를 거느려 이릉에서 오나라한테 참패이후로
촉한의 사업은 내리막길릴을 걸었다..
유비 죽은후 충칭 백제성에서 제갈량한테 탁고한후
제갈량은 남방을 평정한후 북벌을 시작하였다..
결국 형세가 아주 좋은 상황에서
사람을 부적절하게 썼기 때문으로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고말았고
이로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의 공은 물거품으로 되거 만것이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가정(街亭)을 잃었는데
어떤 실패가 촉나라를 비참하게 만들었을가?
본인 생각은 당연히 관운장의
큰 실수로 형주를 잃은 패전이다..
1. 장배가 서주(徐州)를 잃을 당시는
유비의 사업이 창업단계였기때문에
이 실패는 유비한테 주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조기에 창업하여,
줄곧 부평초처럼 근거지도 없고,
실력도 별로 없었으며 후에 갈데가 없어 자기 친구였던
공손찬(公孙瓒)한테 의탁을 하였다..
유비와 공손찬(公孙瓒)은 한나라왕조 말기에
노식(卢植)의 학생이였다
공손찬(公孙瓒) 있는곳에서
유비는 평원령(平原令)이란 작은 관리직을 가졌고..
평원(平原)일때 유비는 계속해서 인심을 매수하여
한 자객이 모두 유비에 감동하여
암살 계획을 포기하게 하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도겸(陶谦)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후,
조조는 서주(徐州)를 도살하였고
도겸(陶谦)은 사람을 여기저기에 보내 구원병을 얻어오게 하는데
오직 유비만이 관운장과 장비를 인솔하여
서주(徐州)로 왔으며
때마침 여포(吕布)가 조조의 후방에서
소란을 피우자 조조는 그 여세를 몰아 퇴병하였다.
도겸(陶谦)이 죽은후 서주(徐州)의 현지 관원들은
유비를 서주목(徐州牧서주주인)으로 섬겼으며
유비도 기쁜마음으로 서주(徐州)를 다싀게 되었다..
하지만 곧 여포(吕布)가 와서 유비한테 귀속하였으며
유비도 여포(吕布)를 받았줬다..
마지막 여포는 장비가 술에 취하였고
유비와 관운장은 원술(袁术)과 싸우는 틈을 타
서주(徐州)를 뺏고 말았다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어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말았지만..
이는 유비한테는 큰 영향은 없다..
왜냐 하면 나중에 유비가 허도(许都)에서 탈출해
다시 서주(徐州)를 차지하다가
조조에 패전하여 관우마저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다.
하여 장비가 서주(徐州)를 잃지 않아도
나중에 조조가 서주(徐州)를 공격하게 되면
유비는 지킬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에
장비가 잃은 서주(徐州)는
유비의 창업에 주는 영양은 별로 없어보인다..
2. 제갈량은 다섯차례 북벌에서 모두 성공을 못 거뒀기때문에
마속(马谡)이 가정(街亭) 을 뺏긴것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후 제갈량이 국정을 주관하게 되고
제갈량은 유비의 한나라왕조의 부흥 소원을 잊지 않았다.
하여 내정에서 일정한 성과를 걷은후
우선은 남방을 평정하여 안뜰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청두로 돌아온후 유선(刘禅)한테 <출사표(出师表)>를 올렸으며 이
로부터 북벌을 시작하였다
제갈량은 처음으로 북벌에 나섰는데,
조위(曹魏)는 어떠한 사상적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조위(曹魏)가 장합(张郃)을 보내 맞설때
제갈량은 마속(马谡)을 보내
가정(街亭)를 지키게 하였는데
결국에 마속(马谡)은
제갈량의 뜻에 따라 진을 치지 않고,
가정(街亭)을 잃으므로
제갈량의 첫 북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제갈량이 북벌할 때 군사는
위나라에 10분의1정도밖에 안되었다..
병사든 무장이든 병참이든 간에 볼 때
촉한은 모두 열세에 처해 있고,
더우기 제갈량은 안정적 진도를 요구하였기때문에
일차 북벌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북벌의 성공이 가능하지 않기때문에
마속(马谡)의 가정(街亭)을 잃은것은 대세에 상관없게 되고
때문에 나중에도 촉한의 운명에 주는 영향은 별로 없어보인다.
3. 관운장이 형주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에서
전략를 날려버린것으로 유비한테는 가장 치명적이다
삼국지에서 관운장에 관하여 높이 받들고 있는것 같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관운장은 손권의 여몽(吕蒙)장군보다
못해보인다고 생각한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머리 숙일줄 모르고..
사실은 여몽(吕蒙)등 손권밑의 장군들보다
총명해보이지 않은데..
너무 자신감이 넘쳐 날들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비가 한중(汉中)을 공략후 그의 업적은 절정에 이르렀고..
이는 용중대()에서 얘기했던 전략중 두개를 완성한셈이다.
이제 세번째로 형주(荆州)와 익주(益州)
두 갈래로 북벌에 나서면
장안(长安)과 낙양(洛阳)에서 만나게 되여
유비의 목표가 완전 실현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한중왕(汉中王) 자리에 올랐고
동시에 관운장, 장비, 마초(马超), 황충(黄忠)을
전후좌우(前后左右)사장군(四将军)으로 임명하였으며
관운장한테는 병사를 컨트롤할수 있는 권리를 줬다..
결국에 관운장은 바로 양번(襄樊)전투를 발동하였고..
더더욱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는 7군을 수몰하였고
우금(于禁)을 사로 잡았으며
방덕(庞德)을 죽여 화하(华夏)에 위세를 떨쳤으며
조조는 놀라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손권(孙权)과 신의를 버려
손권은 여몽(吕蒙)을 보내
백의도강(白衣渡江)하고, 뒤에서 관운장를 기습하였다.
결국에는 관운장은 큰 실수로
형주(荆州)를 잃고 본인도 잡혀서 참살당하였다
관운장이 형주(荆州)를 잃으므로 융중대(隆中对)의 전략에서
두갈래로 북벌할려는 계획이 파괴되었고
이때문에 이릉대전(夷陵之战)을 유발하였으며
유비의 패전으로 촉나라는 이때부터 내리막길로 달렸다..
제갈량은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했지만 힘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관우가 형주를 잃고 촉한의 멸망을 결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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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얘기 나오면 자연히 관운장, 장비 등 무장들 떠오르게 되고..
확실히 난세속에서 영웅들이 많이 나온다고
멋진 무장들 많이 나오는것 같습니다.
노래에 --강산을 좋아하지만
미녀를 더더욱 사랑한다는 가사가 있듯이..
수많은 영웅이 쏟아져 나오는 삼국시기에
당연히.. 미인도 동반할것입니다.
그럼 삼국지에서 나오는 10대 미인을 알아볼가요?
초선(貂蝉)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 고대 4대미인입니다.
<삼국지에서> 초선은 동한말년
사도(司徒)였던 왕윤(王允)의 수양딸이였고
권력을 쥐고 있는 동탁(董卓)의 어이없는 통치를 뒤엎기 위하여
성공적으로 미인계를 이용하여
동탁(董卓)과 여포(吕布) 사이 이간을 시켰습니다
결국에는 동탁(董卓)은 여포(吕布)손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후로 초선(貂蝉)은 여포(吕布)의 첩으로 되어
여포(吕布)따라 서주(徐州)로 왔습니다.
샤피(下邳)대전후 여포(吕布)는 조조(曹操)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초선(貂蝉)은 여포(吕布)의 가족들과 함께
허창(许昌)으로 갔으며 그후로는 종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난세속에서는 예쁜 여자는
자기 운명을 자기절로 좌우지 못하고
단지 남자들의 이용수단일뿐인것 같습니다..ㅠㅠ
사람들은 여자가 예쁘게 생겼다고 표현하는데,
흔히 '감월 수치화(闭月羞花之貌)'와
'침어 낙안지용(沉鱼落雁之容)'에 비유하게 되고
여기에서 나오는 <폐월(闭月)>은
중국 고대의 4대 미녀 초선(貂蝉)을 일컫는 말로,
그 아름다움에 달이 부끄러워
구름사이로 숨어버렸다는
“闭月羞花”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초선(貂蝉)이 화원에서 달을 감상하고 있을무렵
바람이 살며서 불어옫더니 구름 한송이가 달을 가렸는데..
마침 이걸 본 왕윤(王允)은 자기 딸이 너무 예뻐
달도 구름속에 감춰버렸다고 선양하였습니다.
견미(甄宓)는 역사책에서 견부인(甄夫人)으로 나오며
군산군(中山郡)의 무극현(无极县)
<오늘 하북성 무극(无极)>사람으로
상채령(上蔡令) 견일(甄逸)의 딸이였습니다...
원소(袁绍)의 차남 원희(袁熙)의 아내였으나
원소(袁绍))가 팬전후
조피(曹丕)가 원소(袁绍)집안에 들어가면서
견미(甄宓)를 보는 순간..
너무 예쁜 미모에 그만 빠지고 말았습니다
조조(曹操)는 조피(曹丕)의 마음을 알아차려
바로 그를 위해 견미(甄宓)를 맞아들였죠.
조피(曹丕) 황제로 된후
산양공(山阳公)류협(刘协)은 자기 딸 둘을
조피(曹丕)한테 후궁비빈으로 받쳤고
이귀인(李贵人)과 음귀인(阴贵人)은 모두
조피(曹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에 경미(甄宓)는 많이 실망하여 원망스러운 말을 내비췄고
조피(曹丕)는 대노하여 사신을 보내
견미(甄宓)를 사사하고 예성(邺城)에 매장하였다
조피(曹丕)는 병이 심해져 견미(甄宓)의 아들인
평원왕(平原王) 조예(曹叡)를 태자자리에 올렸고
조예(曹叡) 황제로 된후
견미(甄宓)를 문소황후로 시호를 추증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조식(曹植) 《낙신부(洛神赋)》의
"낙신"은 바로 자신의 형수 견미(甄宓)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견미(甄宓) 죽은후 조식(曹植)은 견미(甄宓)와 락수(洛水)에서
마주친 정경을 머릿속으로 들춰보며
《감견부(感甄赋)》를 썼다고 합니다.
조예(曹叡)는 즉위 후 8년 만에 어머니 이름을 피하기 위해
《낙신부(洛神赋)》로 바꾸었으며
이 글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조식(曹植)과 견미(甄宓)의 연애 비극에 감동하였고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말로
견미(甄宓)를 낙신으로 인정하였다고합니다.
<그 모양은 놀라 날아오르는 기러기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것이 마치 용을 헤엄치는 것 같다.
영요추국화무춘송(其形也,翩若惊鸿,婉若游龙。
荣曜秋菊,华茂春松) 구름 한 점 없는 달처럼 떠다니고
바람의 회설처럼.(仿佛兮若轻云之蔽月,
飘飘兮若流风之回雪。),
멀리 바라보니, 태양이 아침 노을에 오르는 것 같고
(远而望之,皎若太阳升朝霞),
불시찰하여 부루퉁한 눈으로 흘겨보다
.(迫而察之,灼若芙蕖出渌波)>
---《낙신부(洛神赋)》
채문희(蔡文姬)는 중국고대 4대 재능있는 여자중 한명이고
이름은 염(琰), 자는 문희(文姬)입니다.
동한왕조시기 여성 문화작가이고 문학가인 채옹(蔡邕)의 딸이였고,
사람됨이 박식하며 음악에도 능통하였다고 합니다.
채문희(蔡文姬)는 평생 세사람한테 시집을 갔으며
첫번째 남편은 위중도(卫仲道)라고 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죽은후 다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동한왕조 말기에는 중원 대부분 지역이
제후들의 할거로 혼란스러웠고
원래 한나라(汉朝)로 항복했던
<남흉노(南匈奴)>는 그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고,
채문희(蔡文姬)는 흉노의 좌현왕(左贤王)에게 사로잡혀
두 아이를 낳았으며
조조(曹操)가 북방을 통일한후
많은 돈을 들여 채문희(蔡文姬)를 데려와서는
동사(董祀)한테 시집보냈습니다.
이 생에 이미 황사를 나누었으니,
누가 황금으로 몸값을 지불하겠는가.
열여덟 번을 지르고 화내지 말라,
박명이 가인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此生已分老沙尘,谁把黄金赎得身。
十八拍笳休愤切,须知薄命是佳人。)
---《董祀妻蔡琰(동사처채염)》
대교소교(大乔小乔)는 한나라왕조 말기 교공(桥公)의 두 딸이며
큰 딸은 대교(大乔), 작은 딸은 소교(小乔)라고 하며
성이 교(桥)씨이기때문에 그냥 교(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강군(庐江郡)완현(皖县)(지금 안휘성 잠산시潜山市) 사람이고
강북에서 유명한 미인이였으며
손책(孙策)이 완현(皖县)을 공략후
대교(大乔)는 손책한테 시집갔고
소교(小乔)는 주유(周瑜)한테 시집갔었죠
손책이 화살에 맞아 큰 상을 입었을때
큰 딸 대교(大乔)가 밤낮으로 옷을 입은대로,
잠도 못 자고, 밥도 먹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보살펴줬지만
손책은 여전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권이 황제를 칭한 후,
대교(大乔)는 더 이상 속사에 상관하지 않고,
집에만 조용히 있으면서,
옛 청등불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천수를 누렸다고 합니다.
소교(小乔)는 언니보다 상황이 좀 낳았고..
주유(周瑜)와 결혼하여
사랑이 듬뿍 담긴 생활을 11년간 이어왔습니다.
주유(周瑜)가 익주(益州)를 공략할무력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교(小乔)는 노강(庐江)에 아들딸과 조용히 보냈다고 합니다.
서기 223년에 소교(小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때 나이가 47세였다고 합니다.
전설에 조조(曹操)가 강남을 노리는 목적이
바로 대교소교(大乔小乔)위해서라고 합니다.
조조는 맹세를 하면서
"첫번째 소원은 세상을 평정하여 황제로 되는거고
두 번째 소원은 강동대교소교(大乔小乔)를 얻기를 바라며,
동작대(铜雀台)에서, 만년을 즐겁게 보내면,
죽더라도 한이 없으리라!"
번부인(樊夫人)는 창산(常山)사람이고
동한왕조 말기에 계양태수(桂阳太守)
조범(赵范)의 형수였습니다.
적벽대전후 조운(赵云)은 유비(刘备)따라
형주사군(荆州四郡)을 평정한후
유비는 조운을 평장군(偏将军)으로 임명하였고
투항한 조범(赵范)을 대신하여
계양태수(桂阳太守)를 겸직하게 하였습니다.
조범(赵范)이 투항후 뛰여난 미모를 가진 과부형수를
조운한테 선사할려구 했지만 조운의 거절을 당했고
그 이유는 <우리 둘이 같은 성씨로
한가족으로 너의 형수면 꼭 같이 나의 형수가 아니냐,,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냐> 였습니다.
후에 옆에 사람들도 좋은 일이니..
조운한테 장가가라고 권유하지만
조운의 생각은 조범(赵范)의 투항은 진심이 아니라는걸 알기때문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북에는 이교(大乔小乔)가 있으면
허베이에는 더 예쁜 번견(樊甄)이 있으며 .
중원은 풍미인(冯美人)이지만,
그래도 초선(貂蝉)의 미는 가장 뛰어나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손권의 동생 후에 유비한테 시집간 분이고
<삼국지>에서는 손부인으로 나오며
민간연극에서는 손상향(孙尚香)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유비와 손권의 연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손부인은 유비한테 시집간지 3년이 되었으며
그는 그때 당시 전통 여자와 달리 강인한 성격을 가졌고
무예도 가능한 강한 여자였습니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후
손권은 사람을 보내 자기 동생을 오나라로 데려오게 하는데
손부인은 유선(刘禅)을 같이 데려가려 했다가
다행이 제갈량이 그 낌새를 미리 알아차리고
바로 장군 조운과 장비를 보내여
강변에서 가로 막아 유선(刘禅)을 뺏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손부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뒤로 손부인의 소식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삼국시기 역사인물로 오나라 황제 손권의 첩이였고 승
상 보덕(步骘)의 족속이였습니다. .
일찍이 오나라왕 손권한테 시집 가서 두 딸을 낳았으며
바로 전공주(全公主)와 주공주(朱公主)였습니다.
손권이 황제로 된후 부인을 황후 예의대우를 향수하게 하였습니다.
서기 238년 보련사(步练师)는 세상을 떠난후
황후로 추봉후 장릉(蒋陵)에 매장하였고
황제가 첩을 황후로 추봉하는건
손권이 첫 사례였다고 합니다.
보련사(步练师)의 조상은 공문(孔门)72현 중의 보숙승(步叔乘)였고
후손은 진한왕조시기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워
회음후(淮阴侯)로 봉하였으며 바로 방대족(方大族)이였습니다. ..
복련사(步练师)는 천천히 커가면서
뛰여난 미모로 손권한테 첩으로 들어갔고
질투가 없는 복련사(步练师)는
항상 다른 사람을 추천하군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감부인(甘夫人)《기주부지(夔州府志)》의 작명은 감매(甘梅)이고
삼국시기 유비의 아내였으며
촉한후주인 유선(刘禅)의 친엄마였습니다.
감부인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고
어릴적에 점을 보는 사람이 감부인의 얼굴을 보고
<얘는 커서 꼭 귀한 사람이 될거고
그 지위가 높아 황궁에 가서 거처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감부인은 커가면서 얼굴과 체형이 갈수록 특별해지며
18살에 이르러 피부는 백옥과 같고
자태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전설에 유비는 밤에 양지옥으로 만든 인물상을
감부인과 비교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감부인은 평상 유비를 따라
동분서주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엿고
향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며
적벽대전이후 유비는 겨우 안정되었지만
감부인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삼국지>기재에서 동한왕조 말기에 장제(张济)의 아내였고
장수(张绣)의 숙모였으며
<삼국연의>에서 성이 추(邹)씨로 나와
추부인(邹夫人)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연의에서 16회 되는곳에 출연하게 되고
조조강제로 첩으로 삼았으며
이에 격분한 장수(张绣)가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죠..
조조병은 완성(宛城)에서 패전하고
조앙(曹昂), 전위(典韦), 조안민(曹安民) 등
전사하는 등 많은 일들이 발생되었죠..
하루 조조가 술에 취해서 옆에 사람들한테
<성중에 기생이 있느냐?>라고 물었고
조안민(曹安民)는 조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어젯밤 제가 관사의 옆을 살펴보니,
한 부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워서 물어봤는데
바로 장수(张济)의 아내라고 합니다.>라고 알려줬습니다.
조조는 추부인(邹夫人)을 보고
대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조조는 <오늘 부인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오늘 밤은 같이 베개를 베고,
나와 함께 도읍으로 돌아가,
부귀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하니
추부인은 감사하다고 표하였고.. 그
때부터 조조는 매일 추부인과 어울로
향을 누리면서 돌아갈 생각도 안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서 키가 9척이나 된다는 관운장의 키,, 지금의 어느정도 키가 될가.. 새로 출토된 한나라시기 자(尺)에서 답안이 나왔다고 한다 (0) | 2021.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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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삼국지에서유비의 여섯 번의 큰 울음은 가식일까, 아니면 진짜 쓰라린 걸까. (0) | 2021.03.02 |
삼국지에서 관도전(官渡之战)은 사실 결코 관건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원씨 집단이 멸망한 진짜 원인이다. (0) | 2021.02.23 |
삼국지에서 <형주荆州>는 어디에 있는곳일가요? 왜서 삼국간 쟁점이 되었을가요? (0) | 2021.02.10 |
희로애락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옛사람들은 슬플 때 흔히 "울음"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보낸다고 한다
바로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명한 인물
<유비>는 우는걸로 유명해진것 같다
병사가 없어서 울고, 자기 구역이 없어서 울고, 인재가 없어서 울며..
하여간 유비는 울기만 하면 해결되는것 같은데 역사적으로 정말 그럴가?
삼국지를 본 기억으로 유비는 모두 6번 크게 울었던것 같다
1. 허벅지에 살이 올라서...
<삼국지--촉서(蜀书)--선주전(先主传)>,
사마표(司马彪)<구주춘추(九州春秋)>:
유비는 형주(荆州)에서 수년간 거주하면서 어느날 자리에 일어나 이모습을 본 유표(刘表)는 물었다.. 왜그러냐구 유비는: 예전에는 항상 말을 타면서 |
이때 조조(曹操)와 원소(袁绍)는
한창 관도대전(官渡之战)을 하고 있었고..
유비는 전란을 피했지만 형주에서
8년이랑 좋은 세월을 헛되지 보내고 말았다
하루는 유비는 유표(刘表)와 함꼐 얘기 나누다가
화장실에 들어갔고..
습관적으로 변을 보고 허벅지를 보게 되는데..
결국에 허벅지 안쪽에 살이 많이 붙은걸 발견하였다..
허벅지에 살이 쪘는데 이것도 슬픈원인이 되는걸가?
동한(东汉)말기 시절에 무장(武将)들은 전쟁에 나가면 |
유비는 울면서 유표(刘表)한테 자기 허벅지에 살찐얘기를 해주며
유표(刘表)는 유비를 위로하기 위하여
신야(新野)를 유비한테 주면서 그곳에서 주둔하도록 하였고
그리하여 유비는 한번 울음으로 자기 영역이 생겼다
2. 유표(刘表)의 묘를 지나면서
<삼국지-촉서(蜀书)-선주전(先主传)>에서:
유비는 유표(刘表)묘를 지나니, 끝내 울먹이며 떠나갔다. |
이번 울음은 유비가 유표(刘表) 묘를 찾아
작별인사를 할때였고
이때 유종(刘琮)이 몰래 조조한테 투항하면서
유비한테 알리지 않았다..
본래 유비는 조조와 한 번 겨루렬고 별렀는데
결국 유종(刘琮)이 투항하자
유비는 조조의 직격탄을 맞아 황급히 도망쳤다.
유표(刘表)묘를 지날 때 유비는
그해의 은정을 생각하며 통곡하였고..
결국 이 '울음' 이후 많은 형주 인재, 왕족,
백성이 유비를 따라가자 유비의 실력은 일순간에 크게 신장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너무 많아
전진이 느려져서 결국에는 장판교전(长坂坡之战)이 일어났다..
3. 방통(庞统)의 죽음
<삼국지-촉서(蜀书)-선주전(先主传)>에서:
뤄현(雒县)을 포위하다 ,,<방통(庞统)>은 군사를 거느리고 |
방통(庞统)은 뤄현(雒县)을 공격할때
날아오는 화살을 맞았고 돌아갔다..
일찍이 전해내려오는 말에는
<와룡(卧龙), 봉추(凤雏) 어느 한명을 모셔와도 천하를 얻을수 있다고>하였는데
봉추(凤雏)께서 이렇게 돌아가니 괴롭기 마련이다..
사실 유비가 사천을 들어갈수 있는데는
대부분의 공로는 모두 방통(庞统)의 것이다.
방통(庞统)--<봉황(凤凰)>은 유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고..
유비는 진짜로 마음이 아팠었고
그때 당시 유비는 매한마디 할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4. 법정(法正)의 죽음
<삼국지-촉서(蜀书)-선주전(先主传)>에서:
유비는 한중왕(汉中王)으로 된후 법정(法正)을 유비는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고 . |
유비쪽에서 '모주(谋主)'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둘밖에 없었고..
그중 한사람은 방통(庞统)이고
다른 한사람은 바로 법정(法正)이였다
이두분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 이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방통은 먼저 유비를 도와 익주(益州)를 점령후 죽었고
법정은 유비를 도와 <한중의전(汉中之战)>에서 이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갔다
<한중의전(汉中之战)>은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처음으로 걷은 승리여서
정말로 쉽지 않은 전투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정(法正)과 유비의 관계가 매우 좋다는 것이고
법정(法正)이 유비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은
마치 곽가(郭嘉)가 조조의 마음속에 있는 비중과 같은것으로
법정(法正)의 죽음은 유비한테 엄청 큰 타격이였다..
유비는 생전에 법정(法正) 1명에게만 시호를 추서하고,
시호는 "익(翼)"이었고 시법에서 "익(翼)"의 뜻은 사려가 심원하다는 것이며
유비는 법정(法正)의 기모(奇谋)를 그리며 며칠째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5. 유봉자제(刘封自裁)
<삼국지-촉서(蜀书)-선주전(先主传)>에서:
"(유비) 於은 (유)에게 죽음을 내리시어, 자결하게 하였다." |
유봉(刘封)의 원래의 성씨는 <커우(寇)>이며 유비가 입양한 아들이며
유비의 명의상에서 첫번째 아들이였고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여, 유비를 위해 많은 큰 공을 세웠다
형주에 온 후의 유비는 필경 이미 반백이 가까웠으니,
아직도 계승할수 있는 아들이
없으면 기타사람들은 어떻게 할거구
그는 반드시 합법적인 아들이 상속받아야만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기때문이다
의자(義子) 유봉(劉封)은 이런 고려의 산물이고
만약에 아직도 유비한테 친아들이 안생기면
유봉(劉封)은 바로 후계자로서, 이후에 유비의 기업을 계승할 수 있다.
하필 유비가 늙어서 아들을 얻었으니,
바로 후주 유선(刘禅)이였고 유봉(刘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으며
유봉(刘封)의 용맹은 오히려 유비로 하여금 위협으로 느껴졌다
제갈량은 일찍이 유비에 대하여 유봉(刘封)의 처리는
늦기 전에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일깨워 주었고
이리하여 유비는 유봉을 상용(上庸)을 지키게 하였으며
관운장이 패전하여 후퇴할때 유봉(刘封)은
수수방관(袖手旁观)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유비에 의해 구실을 찾아
유봉(刘封)한테 죽음을 내리시어, 자결하게 하였다..
비록 유봉은(刘封)유비가 죽음을 내려 자결하였지만
필경 유비의 양아들이기때문에
감정이 있는만큼 결국에는 속상하여 눈물을 흘렸다
6. 전예(田豫)과 눈물로 이별하다
<삼국지-촉서(蜀书)-전예전(田豫传)>에서:
유비가 예주자사(史州字史)로 있을때 전예(田豫)는 |
전예(田豫)는 자가 국랑(国让)이고
유주어양(幽州渔阳)사람이며
그는 전에 유비의 부하였다..
유비가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직임하고 있을때
전예(田豫)는 어머님의 년로하여 가봐야 한다고
유비한테 부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에 유비는 울면서 작별인사를 하였으며
유비는 <자네하고 대업을 이루지 못한거 대해서
너무 아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예(田豫)는 보통사람이 아니며
그는 조조를 도와 북방 민족을 막아낸 제1인자였다.
진수(陈寿)의 <삼국지>에서 전예(田豫)는
만충(满宠), 챈조(牵招), 궈화이(郭槐)등 사람들과
같은 분류의 유명인으로 기록하였고
이 사람은 지략도 꽤 있고 문무도 겸비하고 있다.
그의 이별은 유비한테는 크나큰 손실이였고
후에 전예(田豫)는 북쪽 정벌로 대군(代郡)으로 나가서
우헝(乌桓)과 선비의 연합국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동쪽으로 공손연(公孙渊)과 큰 전투를 벌였고 .
동오(东吴) 사신 주하(周贺)를 습격 살해하였으며
합비(合肥)신성(新城)에서 만충(满宠)과 연합으로
손권(孙权)의 10만대군의 포위공격을 막았냈다
마지막 전예(田豫)는 조조의 태중대부(太中大夫)라는 큰 권리를 맡았고
조조(曹操), 조피(曹丕), 조예(曹睿), 조방(曹芳) 등 시대를 겪어
향년 82세로 그때 시대로는 장수였고.. 그것도 장수 장군이였다..
(유비한테로 안가기 잘했네--본인 생각)
저적 진수()는 그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았고
전예(田豫)의 능력으로 태수(太守) 이상의 권위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 유비 6번 크게 울었던 사건을 정리해봤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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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전(官渡之战)이 끝난지 7년 넘었는데도
광활한 하북지역에는 여전히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여기서 만약에 원소(袁绍)가 조조(曹操)를 이긴다 해도
오히려 전쟁의 불길은 더 퍼질것이고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집과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는 원소(袁绍)내부에서 발생되는 모순때문이다..
원소(袁绍)의 지시에 따르면,
그가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내란이 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동탁(董卓)이 난을 일으키면서부터
동한(东汉)왕조는 이미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각 군벌이 몇 개 군현을 차지하였고
몇 천 병마를 거느리면, 한 지역을 할거할 밑천이 생겼다..
이때 이 난투극 중에 원소(袁绍)는 강경하게
천하의 13주중--청(青), 유(幽), 익(冀), 병(并) 4개주를
손아귀에 넣었고
휘하에는 <병사10만명, 말 만필>를 차지 하고 있어
화북지역의 거대한 대물이 되었다..
기득권 집단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대권의 안정적인 교체가 필수적이다..
원소(袁绍)한테는 아들이 3명이 있고
그때 전통으로는 반드시 큰아들 원담(袁谭)을
일찍이 후계자리에 올려놔야 한다
그러나 원소(袁绍))는 하필이면 원담(袁谭)과
차남 원희(袁熙), 조카 고갱(高幹)을 각각 한 주씩 거느리게 하였고
자기는 작은 아들 원상(袁尚)을 데리고
그룹의 핵심지역인 익주예성(冀州邺城)에 거주하였다..
상전의 이런 조작에 직면하여
모사 저수( 沮修)의 한 마디는 "필시 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원소(袁绍)의 이유는
이 아이들을 단련시켜 그들의 능력을 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의 내심은 원상(袁尚)이
점차적으로 내부 각 계파의 승인을 받아
형 원담(袁谭)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막내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건
일상에서 많이 보는 일이고..
더더욱 원상(袁尚)은 준수한 얼굴을 가진 잘 생긴 남자였으며..
생김새를 몹시 중요시하던 시절에는 분명 많은 인상을 주게 된다.
조조(曹操)가 죽을때까지 황제칭호를 하지 않은 원인중 하나가
본인의 용모에 자신이 없었고
남들이 <용모를 보면 군자 같지 않다>는 비웃음을 받을가봐였다고 한다
게다가 원상(袁尚)은 또한 원소(袁绍)의 정처 유씨의 편애를 받았고
정처 유씨가 베개머리에서 부추기면 원소(袁绍)도 그 유혹을 떨칠수 없었고..
본인도 막내아들 더 사랑하는터라 속으로
꼭 막내아들을 후계자신분으로 만들 생각을 국건히 하였다
하지만 노련학 원소(袁绍)도 이게 쉽게 않다는걸 잘 알고 있고
일단 마음속에 담아두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형세는 남보다 강하다.
건안7년(서기202년)의 5월 관도전(官渡之战)에서 패전한
원소(袁绍)는 달갑지 않은 분노에 피를 토하여 죽으면서
전혀 원상(袁尚)을 후계자로 세우지 못했는데,
마침 원담(袁谭)이 청주(青州)를 통솔하도록 파견되었다.
이로서 최고 권력자리는 비여 있었고..
두쪽은 모두 병권을 갖고 있기때문에
내전은 일보직전이 되었다..
첫번째로 피살된 사람은 봉기(逢纪)였다..
이해 9월 조조는 리양(黎阳)에 주둔하고 있는 원담(袁谭)을 공격하였고
원담(袁谭)은 원상(袁尚)한테 구조를 요청하였고
원상(袁尚)은 소량의 병마만 보냈을뿐만아니라
봉기(逢纪)를 붙혀 감시하게 하였다..
이에 노한 원담은 봉기(逢纪)의 목을 잘라 제를 지냈다고 한다
봉기(逢纪)의 죽음은 결코 억울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봉기(逢纪)는 신배(审配)와 함께
원담(袁谭)의 좋은일을 파괴했기때문이다..
원담(袁谭)은 장남이긴 하지만
그의 통치하에 있는 청주(青州)의 민생은 정말로 엉망진창이였고
그 사람은 군주의 풍격을 전혀 없지만,
원소(袁绍)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전통에 따라 원담(袁谭)을 불러 계승시켰다.
그런데 하필 봉기(逢纪)와 심배(审配)는
줄곧 원담(袁谭)을 지지 하는
신평(辛评)과 곽도(郭图)와 관계가 안좋았고..
만일에 원담(袁谭)이 군주자리에 앉게 되면
신평(辛评)등은 반드시 세력을 가지게 되고
자신들한테 불리하게 되는건 당연할거라고 생각한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봉기(逢纪)와 신배(审配)는 먼저 손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상(袁尚)을 예성(邺城)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돌아온 원담(袁谭)이를 성밖으로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였다.
이때부터, 권력의 유혹과 친신의 부추김으로
두 형제는 마음에 틈이 생겼고
다음해 5월 조조가 물러난후 예성(邺城)내에서는
두 형제의 내전이 폭발하였다.
본래 조조(曹操)는 승승장구하여,
일거에 여양(黎阳)에서 예성(邺城)으로 쳐들어갈 작정이였지만
곽가(郭嘉)가 말렸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토끼도 급하면 사람 문다고 하는데..
더더욱 그들은 형제이기때문에 급하게 몰아넣으면
그들이 서로 합작하게 될것이고 우리한테 불리하게 될것이다.. .
오히려 우리가 물러나고 .. 두 형제는 외부의 압력이 없으면
내부의 모순이 폭발할거고 곧 서로 싸울것이며
우리는 옆에서 기다렸다가
저절로 굴러오는 승리를 잡으면 될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조조(曹操)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원담(袁谭)은 신평(辛评)과 곽도(郭图)의 부추김하에
동생 원상(袁尚)과 싸우게 된다..
하지만 형 원담(袁谭)은 무기력 하고 능력이 안되여
혼전속에서 패전하고 남피(南皮)현으로 물러났다.
당시만 해도 조조(曹操)는 관도전(官渡之战)에서 7만여 명을 참살하고도
원가(袁家)의 두터운 기반을 흔들지 못했거니와
원소(袁绍)는 전후에도 반란을 일으킨 지역을 되찾아 그 위세는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큰 덩치 때문에 내부 파벌들이 즐비하고
암투가 끊이지 않는 것도 약점이였고
이른바 '병사는 많은데 분화는 분명치 않으니,
장교들은 교만하고 명령은 일치하지 않는것'라는 것이다.
원소(袁绍)가 세아들들에게 각각 한 주씩 이끌게 된 것도,
어느 정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은 최적해 한것이고
필경 친아들이기때문에 하북토족가족들보다 믿을수 있기때문이였다
원소(袁绍)가 살아있을때만 해도
자신의 위망(威望)이 어느정도 있기때문에
밑에 사람들을 누룰수 있지만
그가 죽으면,
각 파벌은 반드시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해
종룡공신(从龙功臣)의 광이 되고 싶어 했을수 있다
물론 원씨(袁氏)집안의 형제들은
대국을 위하여 단결을 우선으로 하면
적어도 겉면상의 통일은 유치할수 있으며
이것만으로 갖고 원씨(袁氏)집안은 천하를 제패할 만하다.
이점은 원담(袁谭)의 부하 왕수(王修)가 잘 알고 있었다..
친형제가 마치 사람의 두손과 같은 존재인데
남들과 결투하기 전에 오른손을 자르고 나서
"내가 이겼다"고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형제는 두손으로 다른사람과 결투할때
왼손을 짜르고 <내가 이겼다>고 외치면 되는건가?)
하지만 필경 원담(袁谭)이 속에 매듭을 풀어놓는다해도
동생 원상(袁尚)이 형한테 기회를 안줄려고 한다.
건안(建安)8년의 10월 원상(袁尚)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담(袁谭)이 있는 평원현(平原县)을 포위하였고
이 악박을 못이겨 원담(袁谭)은
饮鸩止渴(목이 마르다 하여 독이 든 술을 마셔 갈증을 푼다)로
하필 조조한테 귀순하여 구조를 요청하였다
원담(袁谭)의 투항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도미노효과를 초래하였다..
원씨(袁氏)집안에 속했던 소유(苏由),
한범(韩范), 량치(梁岐)등 하나둘씩 조조한테 투하을 하였고
조조도 응쾌이 받아서 작위(爵位)를 상으로 주는걸로
더 많은 원씨(袁氏)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다음해를 기다려 시기가 되어 조조는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심배(审配)가 지키고 있는 예성(邺城)을 포위하였고
5월부터 쌍방은 서로 이기거나 지거나 하면서,
거의 모든 공방 수단을 다 썼고
8월에 와서 예성(邺城)은 함몰되지 않았지만
성내에 있는 백성들은 절반이상 굶어죽어갔다..
그렇다면 주재해야 할 원상(袁尚)은 뭐하고 있는걸가?
말하자면 풍자적인데
이 생사가 걸린 시간에 원상(袁尚)은 여전히 평원에서
원담(袁谭)과 3개월동안 서로 싸웠고
원상(袁尚)이 철군하여 구원할 때에 조군의 일촉즉멸에 이르렀다..
부하 마연(马延), 장이(张顗)는 임점투항을 하였고
혼란속에서 원 씨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수(印绶)와 옷가지 등이 모두 조군에 뺏겼다..
이로서 원씨(袁氏) 본거지인 예성은 함락되고,
심배(审配)는 죽임을 당하였으며
원씨(袁氏) 집안의 대세는 이미 사라졌다.
고승(高幹)은 병주(并州)를 갖고 조조한테 투항하였지만
뒤이어 피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고
원상(袁尚)은 유주(幽州)로 도망가 원희(袁熙)를 찾았으며
원담(袁谭)은 다시 조조를 배반하여 두개월후
조씨(曹氏)집안의 제자인 조순(曹纯)에서 피살되었다..
이때는 건안(建安)10월 정월(서기 205년) 이였고
이는 원소(袁绍)가 돌아간지 2년밖에 안된 시점이였다
원담(袁谭)인 죽고난후 이어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의 내부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손쓰기전에
원희(袁熙)의 부하인 조추(焦触), 장남(张南)은
먼저 원가(袁家)형제를
요서(辽西) 소수민족인 오환(吳環)이 있는 곳으로 몰아갔다.
유주(오늘의 하북성) 는 그때 당시
한조(汉朝)나라의 북부 변두리 변경쪽에 위치하였고
주변은 모두 소수민족 구역이 엄청 많았고
중 타뚠찬위(蹋顿单于)가 인솔하는
오환(乌桓)부락이 가장 강대하였다.
다행이 원소(袁绍)가 유주(幽州)를 차지한후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타뚠찬위(蹋顿单于)는 원씨(袁氏)집안과의 의리를 위하여
원씨(袁氏) 고향을 회복하는 것을 돕기로 출병에 나섰다..
그 바람에 워낙 조용하지 않았던
북방은 다시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건안(建安)11년 (서기 206년) , 조조(曹操)는
곽가(郭嘉)의 권유로 경기병(骑兵)을 이끌고 조용히 출격하였고
한길에 백단(白檀), 평강(平冈), 류성(柳城)을 지나
그해 8월에 백랑산(白狼山)에서
타뚠찬위(蹋顿单于)와 원희(袁熙),원상(袁尚)이 조성한
수만명의 연합군을 만났다..
조조(曹操)는 높은 곳에 올라가 상황을 알아보는데,
오환(乌桓)은 비록 사람이 많았지만 군기가 흐트러지고
부대가 정비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산넘고 물건너 멀리 이 추운지역에 온것도
단지 한 가지 일을 다 끝내기 위해서였으며..
바로 원시(袁氏)네 잔세력을 철저히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좁은 길에서 적을 만나면 용감한 쪽에서 이긴다고
조조(曹操)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료(张辽)를 선봉으로 하는 조군(曹军)호표범(虎豹骑)들은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한차례 격렬한 전투끝에 타뚠(蹋顿)은 그자리에서 참살되었고
조조(曹操)는 한번에 료서(辽西) 지역 20여만명의 인구를 얻었다..
타뚠(蹋顿)죽고난후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은
천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료동태수(辽东太守)공손강(公孙康)한테 찾아갔다
조조(曹操)의 많은 장군들은 추격을 요청했지만
조조(曹操)는 철수를 선택하였고
그는 공손강(公孙康)이
원 씨(袁氏) 두 형제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과연 료동(辽东)으로 간 원희(袁熙)와 원상(袁尚)은
결코 분수에 만족하지 않고
공손강(公孙康)에게 해를 끼칠 궁리를 하다가,
공손강(公孙康)에게 들통났다.
그래서 공손강(公孙康)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유살하고 조조에게 그들의 머리를 바쳤다..
사실 조조(曹操)는 당초 곽가(郭嘉)가 권했던 것 처럼
궁구막추(穷寇莫追)의 방법을 선택했던거고
그는 원씨(袁氏)집안의 형제는 외부의 압박이 없어지면
공손강(公孙康)과 내부다툼을 할것이라는걸 분명이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원씨(袁氏)집단의 뼈속에 묻혀있는 고질병인것처럼
결국에는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것이다.
어쨋던간에 건안(建安) 11년 겨울 하늘을 스쳐 땅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한때 군림했던 원씨 집단은 이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당초 조조(曹操)와 원소(袁绍)가 함께 기병(起兵)할 것을 생각하면,
원소(袁绍)만은 하북 연조(燕赵)의 땅과 통솔자인 이적(夷狄)을 제치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세력을 다툴 생각을 하였다.
조조(曹操)는 자기가 천하의 지략 있는 사람들을 모아 자기가 쓸 수 있도록 하고
이걸로 천하를 종횡무진하겠다고 말하였다..
만약 삼국지 저자가 의도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니라면,
이 대화에서 구도의 고저(高低)는,
아마 이때부터 원조(袁曹) 두 집안의 운명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후세 독자들로 하여금 탁식을 금치 못하게 하고 감개무량하게 한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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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는 무장뿐만 아니라 미녀도 많으니, 삼국지 10대 미녀 알아볼가요? (0) | 2021.03.16 |
삼국지에서유비의 여섯 번의 큰 울음은 가식일까, 아니면 진짜 쓰라린 걸까. (0) | 2021.03.02 |
삼국지에서 <형주荆州>는 어디에 있는곳일가요? 왜서 삼국간 쟁점이 되었을가요? (0) | 2021.02.10 |
제갈량은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는 것일가? 여섯번 치산산(祁山)을 출마하였는데 매번 공없이 돌아왔다? ~~ (0) | 2021.02.05 |
삼국지에 형주<荆州>가 자주 등장합니다
무한에서 7년간 생활하면서..
장강삼협 아마 수백번은 다녔던것 같습니다.
호북에서 여행상품으로 장강삼협이 메인상품이고
삼국지 코스도 많이 다녔어요..
장강삼협 크루즈는 대부분 의창에서 승하선하고..
가끔 형주부두에서도 승하선 할때도 있지만
극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형주는 무한에서 의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하였고..
(무한에서 의창까지 330키로정도이고
무한에서 형주까지100키로정도 됩니다. )
삼국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서 의창에서 하선후 형주는 꼭 들려
형주고성과 형주박물관이 필수 코스였습니다.
형주는 삼국지와 연관되기도 하고 초(楚)나라 수도였던
기남성(纪南城)이 형주부근의 봉황산에 있어요
기남성(纪南城)에서 초장왕(楚庄王)의 무덤을 발견하였고..
발굴된 많은 문물들이 형주박물관에 진렬되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해서인지.. 박물관을 엄청 좋아했어요..
다녀봤던 박물관중 호북성박물관과 형주박물관이 가장 좋아했고..
(성도 금사유적지랑 삼성퇴박물관도 괜찮긴하지만)
예전부터 호남성 박물관에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그냥 스쳐가버려서,,나중에라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서안 병마용은 어마어마 하긴 하지만..
글도.. 저는 형주 박물관이 좋습니다.
형주박물관에는 초나라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기(춘추전국시기 초나라의 청동기가 가장 발달되었습니다.),
칠기(인류최초칠기만듬), 실크(인류최초 실크 발명), 미이라등 전시되어 있어요..
다시 주제로 돌아와 오늘은 <형주>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삼국지에서 형주(荆州)가 엄청 중요한 곳입니다.
조조가 남하하여 <적벽대전>의 발동의 목적은
바로 형주(荆州)를 점령하기 위해서이고
손권이 여동생을 유비한테 시집보내는 목적도
형주(荆州)를 돌려받기 위해서입니다.
여몽(吕蒙)이 흰옷차림으로 강을 건느는 사건과
관운장 매성(麦城)으로 패주하는 사건
마지막 유비 대규모로 동오(东吴) 대대적으로 공격하면서..
이릉(夷陵--지금의 의창시)대전에서 패전하는 사건 등등도 모두 형주때문입니다.
함으로 삼국지 후반부에서 형주(荆州) 쟁탈전을 에워싸고 전개 되었고..
형주(荆州)는 엄연히 삼국에서 가장 중요한 한 축이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형주(荆州) 는 왜 이렇게 중요했을가요?
또 삼국지에서 나오는 형주(荆州)는 오늘날 호북성 형주(荆州)시일가요?
▶1. 형주(荆州)의 지리적위치
형주(荆州)--지금도 이 이름으로 되어 있는 도시가 있고
바로 호북성 형주(荆州)시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형주(荆州)를 이곳으로 생각하죠..
사실상 삼국시기의 형주(荆州)는 어느 한 도시가 아니고
큰 지리적영혁으로 .. 한국의 도 랑 비슷합니다.
동한말년 천하는 13개주(13개성)으로 분활되었고
형주(荆州)는그중 한개 주 였던것입니다.
지도에서 보면 형주(荆州)의 범위는 호북성과 호남성 전체가 들어가고
하남성 남쪽 엄청난 면적이 포함됩니다.
삼국시기 형주(荆州) 관할하에는 모두 7개군이 있고
그기에 남양군(南阳),남군(南郡),
강하군(江夏郡), 무릉군(武陵郡), 장사군(长沙郡),
령릉군(零陵郡)및 계양군(桂阳郡)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표(刘表)가 형주(荆州)정권을 장악하고 있을무렵에
형주(荆州)의 소재지는 지금의 호북성 양양시(襄阳市)였고..
지금의 형주(荆州)시가 아니였습니다.
지금의 형주(荆州)는 삼국시기에 강릉(江陵) 이라고 하였습니다.
▶2. 형주의 정권 교체
형주(荆州)는 삼국시기에 누구한테 고정되지 않았고..
마치 핫하고 군침이 도는 케이크마냥
군웅(群雄)들한테 뜯기거나 쟁탈되는 곳이고..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이역 횟수를 기록한 영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류표(刘表) 정권을 장악할때(190년--199년)
서기 190년에 류표(刘表) 는 형주(荆州)정권을 장악하면서
아울러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이어 형주(荆州)6군(郡)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북부에 위치한 남양군(南阳郡)은 초기에 원술(袁术)이 차지하고 있다가
후에 원술(袁术)이 패전하여 죽은후 류표(刘表) 도 남양군(南阳郡)을 차떼기하였고
이로써 형주(荆州)7군(郡)은 거의 류표(刘表)에게 넘어갔습니다
2.손권(孙权)이 강하(江夏)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남양(南阳)을 점령하였습니다.(199년--208년)
서기 199년 완성(宛城)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장수(张绣)는 조조한테 투항함으로
남양군(南阳)는 서서히 조조의 통제에 들어갔었습니다.
남양군(南阳)은 조조와 류표(刘表) 사이를 수차례 오가며 일진일퇴를 벌였습니다.
208년에 이르러 손권(孙权)은 아버지 복수를 위하여
강하(江夏--오늘 무한의 무창)의 장조(张祖)에 향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고
곧 강하(江夏)를 통제하였습니다. 강하(江夏)는 장강 이남에 위치하였고 오늘날 호북성 무한 무창입니다.
여기까지 형주 7군(郡)에서 남양(南阳)는 조조한테 뺏기고
강하군(江夏)은 남부 손권(孙权)한테 뺏기므로 류표(刘表)한테는 형주5군(郡)만 남았습니다.
3. 조조 남쪽으로 내려오고 류종(刘琮)은 투항하다(208년)
208년7월 조조는 군사를 거느려 남쪽을 내려오면서 형주(荆州)를 진공하였고
류표(刘表)는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류종(刘琮)이
형주(荆州)5군(郡)을 갖고 조조한테 투항하였습니다.
유비는 신야(新野)에서 패전하여 하구(夏口--오늘 무한시 한양)로 후퇴하였으며
이때 형주7군(郡)은 강하(江夏-지금 무한 무창)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는 모두 조조한테 통제퇴고 말았습니다.
4. 적벽대전(208년--209년)
208년 12월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전하여남양군(南阳郡)으로 후퇴하였고..
오나라 주유(周瑜)는 군사를 거느리고 남군(郡)을 진공하여 점령하였으며
유비는 바로 형주남부4군(郡)을 뺏어 점령하였습니다.
5. 유비 형주(荆州)를 빌려가다
이때 유비는 공안(公安--현재도 公安현으로 형주시에 소속되어 있습니다.)에
주둔하여 발전에 불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손권(孙权)한테 남군(南郡)을 요구하였고..
로숙(鲁肃)은 손유(孙刘)동맹을 고려하여
손권(孙权)보고 남군(南郡)을 유비한테 빌려주라고 하여..
유비는 형주5군(郡)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6. 유비는 사천에 들어갔고 유비와 손권은 상강(湘水)을 경계으로 하였습니다.(215년)
215년 유비는 익주(益州)를 뺏은후에
손권(孙权)은 유비한테 형주(荆州)를 요구합니다.
유비는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하기 위해서
장사군(长沙郡), 계양군(桂阳郡)을 손권(孙权)한테 돌려주고
유비와 손권(孙权)은 상강(湘水-호남성에서 가장 큰 강)을 경계로 하여 형주를 갈랐습니다.
이때 유비와 손권(孙权)은 각자 형주(荆州)3군(郡)을 점령하였고
남양군(南阳郡)은 여전히 조조한테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7. 관운장이 실수로 형주를 잃는다(219년)
219년 여몽(吕蒙)은 강릉(江陵-지금 호북성 형주)을 기습하여
남군(南郡)을 공격하였고..
형주의 무릉군(武陵郡), 령릉군(零陵郡)도 소문을 듣고
동오(东吴)에 항복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운장은 매성(麦城-호북성 당양시에 소속된 한 진이고
지금도 麦城이라고 합니다. )에서 패주하여 포로가 되어 죽습니다.
이때 형주7군은 조조가 차지하고 있는 남양군(南阳郡)외
나머지 6군(郡)은 모두 손권(孙权)이 점령하였으며
유비는 형주(荆州)를 철지히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되면 삼분천하의 구도가 이미 전면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확실히 형주(荆州)는 삼국 시대에 가장 핫했던 땅임을 알 수 있는데..
형주(荆州)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가요?
▶형주(荆州)의 중요성
형주(荆州) 중요성을 3개 방면으로 얘기해봅니다.
지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수 있는데
동한(东汉)13개주 가운데.. 형주(荆州)의 면적이 비교적 크고
북방의 연주(兖州), 서주(徐州)에 비하면 형주(荆州)는 면적이 광활하고
더욱이 돌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강한평원은
군벌이 할거하는 데 절호의 기반으로 됩니다.
자고로 호북지역에는 선비들 많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이지역 이상하게 유명한 인물들도 많이 나오고 모이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동시에 형주(荆州)의 인구는 다른 주에 비하면 가장 많고
역사책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말년 형주의 인구는 620만명이였고
원소(袁绍)가 통제했던 기주(冀州)의 인구는 590만명이며,
도겸(陶谦)이 통제했던 서주(徐州)의 인구는 280만명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주(荆州)는 토지면적과 인구에서 다른 주에 비하면 월등함으로
삼국란세속에서 제후들한테 안정된 식량과 병력 자원을 제공할수 있습니다.
동시에 형주양번(荆州 襄阳) 지역에는 자고로 부터 유명한 사람들 많이 나와
인재자원도 풍부합니다.
류표(刘表)가 형주(荆州)를 껴안고 다른 지역을 탐내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두번째는 형주(荆州)는 장강상류 수로를 차지 하고 있는 우세
알다싶이 중국 역사상 많은 남방의 할거 정권이 출현하였고..
여기에 손오(孙吴), 동진(东晋), 남조(南朝)의 송계량진(宋齐梁陈)등등이 있었고
모두 장강의 천험한 요새에 의지하여 방어를 진행하였고..
물살이 센 장강은 항상 용호가 서리고 걸터 앉는 곳이며
냉병기 시대에는 확실히 더할 나위 없는 천연 장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요새의 약점도 있는법입니다.
만약에 장강상류의 형주(荆州)를 통제할경우면
강따라 내려가면서 남쪽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주는 강남 정권과 북방 정권이 맞서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었고
북방정권은 형주를 통제하면 남쪽을 쉽게 손아귀에 넣을수 있고
남방정권에서 형주를 통제하게 되면
장강의 장벽을 튼튼히 세우고 천혜의 요새에 의지해 방어할 수 있습니다.
형주는 장강의 상류수로를 점유하고 있기때문에 가장 중요한 지리적위치입니다.
세번째는 형주(荆州)는 양양(襄阳) 통로를 지켜 병가가 반드시 쟁탈해야 할 곳이다.
우리가 다 알다싶이 중국은 북방과 남방으로 가르게 된데는
중간에 위치한 자연분계선이기때문이고..
이 자연분계선이 바로 <진령산맥(秦岭山脉)--대별산산맥(大别山山脉)--황허(淮河)>입니다
이 분계선은 엄청 험준한 산과 강으로 조성되어서
냉병기 시대의 군사전쟁에는 천연적인 방어벽이었고
그 경계선 위에 단 한 개의 들어가고 나갈수 입구는 바로 양양(襄阳)입니다.
지형지도에서 보면 양양(襄阳)의 서쪽변두리는 진령산맥(秦岭山脉)이고,
동쪽변두리는 대별산산맥(大别山山脉)입니다.
양양(襄阳)은 이 두 산맥의 대문같은 역할을 하면서..
남북을 연결시켜주며 남양(南阳)분지와 강한평원(江汉平原)을 연결시켜주기때문에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할수 있습니다.
종결어
<삼국지>를 읽으면서.. 저 개인적으로 촉한정권의 몰락은 엄청 아쉬웠습니다.
제갈량의 성공직전의 실패로 엄청 아쉬웠고..
사실 이 모든 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형주에서 비롯됐죠..
일찍이 유비 <삼고초려>에서
제갈량은 <隆中对>에서 완벽하게 장래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줬는데
천하가 변하면 상장(將將)이 형주의 군대를 향해 완(宛)과 뤄( 洛)를 향하게 하고,
장군이 익주(益州)의 많은 사람들를 진천(秦川)에서 거느리면 패업(覇業)이 가능하고,
한실(漢室)이 흥한다고 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유비, 장비, 관운장이 너무 자기주의고 제밖에 모르고
고집이 너무 강했던것 같았으며
만약에 제갈량이 계획한대로 나갔으면 제갈량의 구상한대로 될수도 있었는데..
유비의 능력과 이해력이 너무 부족했던 탓이기도 하고..
유비한테 제갈량은 너무 아까웠습니다.
손권이나 조조에 비하면 유비는 그냥 아무도 모르는 어리애 혹은 시골농민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에 유비는 전국을 통일할려면 제갈량의 초기 구상대로..
반드시 병사를 두팀으로 두갈래길로 조위(曹魏)를 진공해야 했었습니다.
한갈래는 한중(汉中)에서 출병하여 장안(长安)을 진공하고
다른 한갈래는 형주(荆州)에서 출병하여 낙양(洛阳)을 진공하는겁니다.
두 방향에서 동시에 큰 진공을 하면 두
조위(曹魏) 수미(首尾)가 함께 돌볼 수 없게 해야만
한 방에 반드시 승리하여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나 그 비전은 모두 형주의 잃으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죠
그러므로하여 제갈량은 그냥 작은 익주(益州)를 지키고 있어야 하고 어렵게 다른 두 강대한 정권과 싸워야 했고.. 제갈량의 아무리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유비가 갈망하는 <한실을 다시 일으켜 중원을 극복하다.>는 목표는 물거품을 되고 만겁니다.형주, 이렇게 3국의 흐름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시대의 가장 큰 바둑돌이 된겁니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서주(徐州)를 잃었고 관운장은 형주(荆州)를 잃었으며 마속(马谡)은 제팅(街亭)을 잃었으며 그중 누가 촉나라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0) | 2021.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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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28년 겨울.. 제갈장군은 <후출사표>를 올려 두번째 북벌을 하였다..
제갈장군? ,, 제갈승상이 아니고 제갈장군이다..
원인은 첫번째 북벌에서 실패를 당한후 제갈량은 스스로 세 등급 평가절하를 올려
승상이 아닌 우장군으로 되었다..
첫번째 북벌실패에서 반년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제갈량은 다시 용병을 하다니,,뿐만 아니라
더 이상 치사산(祁山)에 나가지 않고 진창도로 갔다.
제갈량의 한중 병단은 이때 병력만 거의 8만 명에 달하지만,
이번에는 수만 명만 징집(주류 사학계에서 인정, 약 3만 명)하고
곡식과 사료를 많이 휴대하지 않아 사후에 증명하듯이,
겨우 한 달 동안 먹을치만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는 제갈량은 병법을 모르고 무력을 남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와촉의 전장터에서 눈을 떼고 3국 전체의 잣대를 들이대면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삼국연의>를 보면서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
촉한은 항상 북벌에 신경을 쓰고 오나라는 그냥 간장역할을 하며
위나라는 촉한을 원수로 생각하고 오나라에 한해서는 개의치 않아 한다..
역사에서 실질상황은 위나라와 오나라의 전장은 항상 삼국에서의 주요전장터였고
이는 마치 2차대전에서 러시어와 독일의 대결과 비슷하였고 위나라와 촉한의 전장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유사하며.. 중요하긴 하지만 삼국시기에 주요 주요전장은 아니였다
▶위(魏)와오(吴) 전쟁의 규모와 격도는, 대부분 위(魏)촉와(蜀) 전쟁보다 강하였다
위나라는 오나라와의 전선에 주둔시켜놓은 병력은 적어도 10만명에 달았고
위나라에서는 옹량(雍凉)지역에 항상 병력을 주둔해놓으며
많을 때면 4만명도 안된다.. 부근 관중(关中)에 주둔지켜놓은 병력을 합쳐도 8만을 초과하지 않는다
(위나라가 자발적으로 촉나라를 진격한 것은 제외이다)
중원지역의 중요성은 옹량(雍凉)보다 크다는건 말할것도 없다..
중원지역은 대부분 평원지대이기때문에 일단 공격당하면..
낙양, 예성(邺城)까지 밀려오는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여 관우가 7군에 수몰하였고 양양(襄阳)의 형세가 불리해졌을 때 조조는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 천도를 고려하였는데 이는 비겁했던거는 아니다..
만약에 양양(襄阳)이 함몰되면 남양분지(南阳盆地)에는 방어할만한 요새가 없고허창(许昌)은 관우의 타격권에 직접 노출된다.
<융중대隆中对>에서 제갈량의 계획은 유비가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락(宛洛)을 향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방향에서 조조의 핵심 지역을 공격하기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다.
중원지역은 사통발달되고 후세 명나라 황제 명성도 주강(朱康)은
황화류역에서 어렵지 않게 장강유역까지 쳐들어는데 3-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방의 세력이 장강에서 황하까지 쳐들어가는 데는
형세가 유리하기만 하면 시간도 그리 길지 않는다..
예를 들면, 광주 혁명 정부의 북벌에도 일 년밖에 안걸렸다..
촉한 북벌, 주요 방향은 룽우(陇右)로 잃어버려도
관중(关中)에 의지하여 굳게 지켜있기때문에
당분간은 조조의 핵심 지역까지 쳐들어오기는 어렵다..
이로부터 위나라에 한해서는 오나라와 촉나라..
어느쪽의 위협이 더 큰지.. 이해할수 있다..
때문에 위나라 조조는 대부분 시간에서
<서쪽은 지키고 동쪽은 진공하는>방식으로 배치하였다..
여기서 촉한이 북벌의 합리성을 해석할수 있게 되고 ..
촉한 기동 병력은 대부분 위나라 서부 전역보다 많다
강호와 곡식운반 'BUG' 때문에
옹주(雍州) 지역은 병력이 가장 약하고, 비교적 오랫동안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고
전술적으로도 진취성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오나라의 북벌 횟수는 촉한보다 적지 않고, 용병의 규모는 10만 명 급에 달한다.
촉한의 북벌에서 10만명 이상의 급에 달하는 경우가 두번밖에 없었고..
그 두번이 바로 제갈량의 처음 북벌과 마지막 북벌이였다..
촉한의 북벌은 대부분 3-4만명의 규모였고..
이를 비교하면 제갈량은 분명히 궁핍한 군사로
무력을 남용하는 것은 아니라는걸 발견할수 있다..
조위(曹魏)는 위나라 오나라 전역에 20만병력을 주둔시켰고..유명한 사마의(司马懿), 장합(张合), 서황(徐晃), 조휴(曹休), 만총(满宠)등 모두 이곳에 주둔하였다..전에 위나라는 오나라에 대해 3차례 큰 규모의 공격을 하였고..오나라는 그 큰 압력을 받았으며.. 그후로 석정전투<石亭战役>에서 역전을 하였다..
삼국지에서 석정전투<石亭战役>를 엄청 자세하게 다뤘다..바로 즉 주방<周舫>이 조휴<曹休>를 이긴 전투이다..이번 전투에서 조조위나라의 손실이 참옥하였고..위나란 군대 남쪽 전역의 총사령이였던 조휴<曹休>는 이번 전투후 병들어 죽었다.
게다가 장합(张合)은 급하게 롱서(陇西)전투에 배치된데다서황(徐晃) 병들어 돌아갔으며이로서 위나라는 오나라와의 대전에서 투입할마한 장군이 없고.. 군심이 불안정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위나라는 동흥전투(东兴之战)후 다시는 오나라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년간의 군사적 압력에 눌려 숨이 막혔던 손권도, 마침내 석정(石亭战役) 전투 후 1년 동안 무사히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이것이 진정한 삼국시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위나라는 오나라와의 패한 전쟁에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즉시 후방 부대를 배치하여 전선을 증원하였다..
제갈량의 첫번째 북벌방향이 룽우(陇右)이기때문에
위나라는 룽우(陇右)의 주둔병역을 추가하였고..
전략적으로 중시를 하게 되었으며
이 병력은 자연히 부근의 관중(关中)에서 뽑아와서는
동쪽전선을 증원하였다..
또한 장안주둔군을 뽑아왔기때문에 관중(关中)지역은 비여있는 상태로 보이며..
이는 촉나라 제갈량이 진창(陈仓)을 떠나 위나라 관중(关中)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전술에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만.. 제갈량은 관중(关中)이 비여있더라도
보병이 주축이 된 촉나라군대는 관중평야(关中平原)에서
위나라와의 결전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는걸 잘 알고 있다..
제갈량이 이번 북벌에서 요구하는 진짜 목적은
위나라의 병력 이동을 견제해 동쪽 오나라쪽으로 증원하지 못하게 하고,
동맹인 오나라의 석정전투(石亭之战)의 전과를 확대하기 위함이였으며
오나라 정국이 안정될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기위해서였다..
이는 동맹의 의무를 다하면서 오나라와 촉나라 동맹의
기본 국책을 다지는 정치전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병사가 있는데도 소용이 없었고, 출정하는 군대도 식량이 많지 않았다는 설명이며.
제한된 병력과 제한된 식량으로, 전략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일류 전략가이고
전반 국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용병만 쓰는 것이야말로 무력을 남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 제갈량과 직업군인 강유(姜维)용병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물론 제갈량이 이번에 이렇게 군사를 운용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어요..
잠시 설명을 하지 않겠고 제3차 북벌할때 확인이 저절로 보여진다..
위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이번의 첫번째 북벌 실패때문에
촉한은 더 이상 북벌안할거라고 여긴다..
북벌한다해도 용우<陇右>에만 용병할것이라고 생각하다..
제갈량은 반드시 다시 용병을 할 것이며
출병의 방향은 진창(陳倉)일 것이라는 게 조진(曹真)의 정확한 판단이다.
▶그럼 왜서 진창(陳倉) 일가..??
촉한의 북벌루트는 대략 5갈래가 있다..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자오도(子午道), 낙골도(骆谷道), 보서도(褒斜道), 진창도(陈仓道) 및 치산도(祁山道) 가 있다..
조진(曹真) 입장에서 해석하면:
1.자오도(子午道),: 이 루트는 엄청 험난하고
위나라에서 준비만 잘하면 이 루트로 들어오는거는
그냥 죽음의 길을 선택할뿐이다.
첫번째 북벌할때는 위나라와 오나라 싸우는 시기였고..
제갈량은 반드시 이 루트를 이용안할것이며
위나라에서 촉나라의 북벌을 알고 있는 상황에 반드시 준비 할것이기때문에제갈량은 이 루트를 선택할리 없다.. 그래서 패스...
2. 낙골도(骆谷道): 이 루트는 자오도(子午道) 비하면 좀 쉽긴하다..하지만 거리상에서 위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상황이 생기면 위나라 군데가 바로 출전할수 있다.. 때문에 재갈량의 군데는 열악한 형세속에서 위나라 군데와 붇게 되고 이는 촉나라군데한테 엄청 불리하다.. 용병에서 조심성을 보여주는 제갈량으로서는 당연이 이 루트를 이용안할것으로 이것도 패스...
3. 보서도(褒斜道): 이전 북벌에서 조자량이 패하고 후퇴하면서 쫓아오는 적을 막기위하여잔도(栈道)를 태워없앴다.. 그래서 짧은 시간내에 잔도(栈道)를 수복한다는건..어려운 일로.. 이 루트도 패스...
4. 치산도(祁山道): 용병 규칙에는 남이 생각이 미치지 않고 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행동을 취하는것이다..
첫 북벌을 거치고 나면,
위나라는 반드시 롱우(陇右)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군사가로 이 도리는 분명이 알것으로 .. 이 루트도 패스이다..
그럼 제갈량이 군사를 쓰는 방향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 남았 다: 바로 진창도(陈仓道)!
참고로,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을 '육출치산(六出祁山)'이라고 하는데, 역사와는 맞지 않아보인다.
제갈량이 북벌을 모두 다섯번 하였고 오직 첫번째와 네번째 북벌을 치산(祁山)으로 하였고..
기타 세번은 모두 치산도(祁山道)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관중은 "제갈량의 팬"인데,
제갈량이 북벌에서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건
치산(祁山)을 출시한 이번 두 번만으로 너무 아쉽다고 생각하고
나관중의 문화연의에서 < '육출치산(六出祁山)'>을 위하여이지만..
매번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하여..사람들께 손목을 쥐고 탄식하게 되여.. 이해가 갑니다.
제갈량의 진로와 대략적인 시간을 정확히 예상한 조진(曹眞)은 장군 하오샤오(郝昭), 왕생(王生)을 천명군대 이끌고 진창(陳倉)에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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